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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수

@Mado_r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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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위무선이 죽었다.

 

  계편 33대와 면벽수련, 위무선을 감싼 죄로 남망기에게 내려진 벌들. 이것이 자중하고 반성하란 의미이자 동시에 혹시라도 들킬지 모를 고소 남씨의 치부를 숨기기 위함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남망기를 외면하고 숨겼다. 추락은 생각보다 쉬웠다. 남망기는 그 모든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눈을 떴을 때 들은 소식이 그의 부고가 될 것이란 건 절대 예상하지 못했다.

 

  얼마나 오래 잠들었던 것인지 방안 가득 은은하게 배어있는 단향목 향기는 온데간데없고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계편의 흔적은 지독하리만치 깊게 새겨져 그 치부를 주장했다. 향을 얼마나 태웠는지 방안은 희미한 연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아 가물거리는 눈앞엔 남희신이 착잡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남망기는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거칠어진 목에선 쇠가 긁히는듯한 소리만 새어 나왔다. 남희신은 그런 남망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건네주었다. 남망기가 목을 축이고 정신을 가다듬는 동안 방안은 침묵만이 가득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 사이로 형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희신은 평소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떨리는 입가와 수척해진 얼굴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 입을 가다듬듯 달싹이던 남희신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남망기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지금 멈추지 않으면 다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남망기는 처음으로 남희신의 말을 끊고 싶다고 생각했다.

  “망기야… 위 공자가 죽었단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리는 동공이 충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새하얗게 질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남희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소식이 들린 지는 좀 지났지만 너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제야 전하게 됐구나.”

  “그것이… 무슨….”

  “사실이란다. 강종주가 그의 최후를 확인했다고 선언했다.”

  남희신이 동생인 남망기를 귀여워하며 종종 장난을 걸긴 했어도 죽음을 가볍게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언제나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두 눈이 슬픔과 착잡함으로 가득 찬 모습에서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남망기는 다급하게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상처가 아물지도 못한 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시계가 어그러지며 뒤섞인다. 분명 상처가 많긴 했어도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는데 어째서 죽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남희신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지만, 소리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 무엇도 인식할 수 없었다. 거친 움직임에 붕대 사이로 다시금 핏물이 새어 나온다. 흰옷을 타고 줄기를 뻗어가며 붉은 꽃이 피어났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박동이 온몸을 두드렸다.

  “일단 다른 이야기는 몸을 더 추스른 이후에 하는 게 좋겠구나.”

  조심스럽게 남망기를 눕히며 붕대를 갈아주는 손길에 남망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남망기를 남희신은 이해한다는 듯 다독이곤 푹 쉬라며 방을 나섰다. 방안에 가득한 정적이 지독하게 눌러앉는다. 남망기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를 두고 가는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가 이렇게 쉽게 스러질 사람이었나. 남망기의 기억 속의 위무선은 누구보다 밝게 빛나던 사람이었다. 흑과 백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사람. 누구는 방종하고 무례하다 하였고 누구는 바람같이 자유로운 사람이라 했다. 그 자유분방한 성격만큼 행실이 가볍다 수군거릴지라도 실력만큼은 인정받았다. 사일지정 이후엔 이릉노조라 불리며 사마외도의 정점에까지 오른 자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죽을 리 없다. 남망기의 미련은 현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상처는 그 순간에도 뜨겁게 불탔다 차갑게 식어가길 반복했다. 소리치고 싶으나 소리칠 곳이 없고, 화를 내고 싶으나 화를 낼 상대가 없으니 결국 향하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갈 곳 없는 원망이 속에서 요동쳤다. 무력한 상황 속에서 딱 하나 다행인 점은 남망기의 이성이 처음 느끼는 격동 속에서도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단 것이다. 불타고 있는 속과는 별개로 그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둘의 사이가 틀어졌다 하더라도 그 강만음이 위무선의 죽음을 허투루 논할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 위무선이 죽은 것일까. 난장강에도 자리를 잡았던 사람이니 말을 맞추고 피신했다고 해도 이상치 않다. 운신이 힘든 지금 상황에선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만 고소 남씨가 이 상황을 치부로 여기고 있는 한 남망기가 내부의 도움을 받는 일은 요원했다. 그렇다면 답은 직접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망기는 눈을 감았다.

 

  상처가 채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찾아간 난장강은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폐허로 돌아가 있었다. 남망기의 시선이 난장강 곳곳을 스쳐 갔지만 혈흔이나 옷자락 같은 흘러간 발자취만 존재할 뿐 그가 찾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을 안고 있던 두 눈에 참담한 현실이 쌓여간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땅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다. 그대로 주저앉아 울부짖고 싶었지만 벌써 무너질 수는 없었다. 기괴하게 불타고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흰 옷자락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복마동에서도 건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그를 매도하고 규탄하던 건 어디로 가고 복마동의 돌멩이 하나마저 남김없이 들춰진 모습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 무서워하고 배척했으면서 그가 만든 것은 탐나던가.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거칠게 모래가 파고들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허망하게 복마동을 나오는 남망기의 귓가에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노련한 수사가 아니면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숨소리는 상태가 좋지 않은지 그마저도 끊겨 들렸다.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남망기의 눈에 커다란 나무 옹이가 보였다. 생각보다 크게 벌어진 옹이 안에는 뭔가를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10살가량의 어린아이라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다급하게 들여다본 옹이 안에는 짐작대로 어린아이가 한 명 들어가 있었다. 잔뜩 더러워진 얼굴이었지만 이곳에 있을 어린아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온원. 위무선이 아꼈던 아이. 남망기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어쩌다 이렇게 혼자 남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난장강의 사기는 노련한 수사에게도 위협적이다. 그것을 제어해주던 위무선이 사라졌으니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리라. 안 그래도 열로 인해 아이의 몸은 뜨거웠다. 자신의 몸도 멀쩡하진 않았지만, 수련을 한 수사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비교될 리 없었다. 생존자를 찾은 이상 이곳에서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기에 남망기는 다급하게 난장강을 벗어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허망하게 놓칠 수는 없었다. 아이의 숨이 곧 끊어질 것만 같아 남망기는 아예 장포를 벗어 아이의 몸을 감싸고 피진에 올라탔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운심부지처로 돌아가는 길은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영력이 떨어지면 내려가 걷고 조금이라도 회복되면 다시 어검을 하며 날아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든 일이 정리된 후였다. 아이는 남씨 성을 받고 입적됐다며 남희신은 조곤조곤히 설명했다. 채 아물지도 못한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눈이 가물거렸다. 끈적한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위무선이 살아있다면 절대 그 아이를 혼자 둘리 없었다. 참으로 웃기게도 위무선의 흔적을 찾은 순간 그의 죽음 또한 현실이 되었다. 나는 결국 너를 잃고 만 것이다.

  남망기는 두 손을 내려봤다. 길게 쭉 뻗은 손가락과 새하얗지만 탄탄한 손. 조형으로만 따지자면 흠잡을 곳 없는 아름다운 손이지만 남망기에겐 한심하기 그지없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지금껏 열심히 수련한 것은 무엇을 위함이었나. 남망기에게 남은 것은 한 줌도 되지 않는 흩어져버린 기억들뿐이었다. 추억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홀로 떠올릴 시간들. 그러나 남망기에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들. 그날 밤 남망기는 실 한 올이라도 닳을까 소중하게 보관하던 향낭을 꺼냈다. 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흘러간 순간은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향낭을 조심스레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든 순간 문득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이 코끝을 스쳐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망기는 꿈을 꾸었다. 눈을 떴을 땐 동굴 한구석에서 위무선이 가쁜 숨을 내쉬며 앉아있었다. 눈앞의 위무선은 검은색과 빨간색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멀쩡한 곳을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잔뜩 상처 입은 위무선을 남망기는 다급하게 끌어안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온기와 박동이, 상처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비릿한 냄새가 생생해 남망기는 문득 여태까지의 일은 두려움으로 인한 찰나의 환상이고 지금이 현실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위무선의 텅 빈 시선과 마주치기 전까진. 죽음이 남망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의 형체를 한 죽음이 손을 뻗는다. 상처가 가득한 마른 손은 어디서 난 힘인지 억세게 남망기의 팔을 쥐어 잡았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시린 한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흰 소맷자락에 붉은 자국이 서서히 스며들어 간다. 뿌리치려 한다면 뿌리칠 수 있었겠지만, 이놈의 얼굴이 문제라. 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망기는 그 순간 절대적인 약자가 되는 것이다. 위무선은 반복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알아듣기 어려웠다. 뻐끔거리는 입에선 지독한 시취가 새어 나왔다. 남망기가 소맷자락이 이상하리만치 젖어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흘러내리는 피가 위무선을 가득 덮고 있었다. 달싹이는 입과 눈에서 끊임없이 피가 샘솟았다. 흘러내리는 피와 살점이 뒤섞인다.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무언가는 그대로 녹아내리며 남망기의 위로 쏟아졌다. 죽음이 감싸 안은 자리는 지독한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손에서 붉은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아득한 공포를 느끼며 남망기는 기절하듯 잠에서 깨어났다.

 

  그날 이후로 남망기는 매일 밤 위무선의 죽음을 마주했다. 악몽은 남망기의 기억마저 침투하며 더 정교해지고 뒤틀리며 그를 조롱했다. 꿈속의 위무선은 수학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생기와 자신감이 넘치던 그는 수행연을 잡다 최후의 순간 남망기의 손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물속으로 끌려가 죽었다. 또 어떤 날은 도륙현무의 동굴 속에서 남망기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가 그대로 먹혀 죽었다. 백가 청담대회 시절일 땐 눈먼 화살에 맞아 허무하게 죽기도 했다. 사람의 생명에 무게를 잰다면 깃털도 이보단 무거울 것이다. 그만큼 위무선은 죽고, 죽고, 또 죽었다. 남망기가 어떻게 발버둥 쳐도 결말은 언제나 위무선의 죽음으로 끝났다. 연화오를 지키다 죽은 시체들 사이에서 눈도 감지 못하고 버려진 그의 모습을 발견했을 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남망기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인세에 지옥이 현현한다면 과연 모두에게 같은 모습일까. 사람마다 지옥의 모습이 다르다면 남망기의 지옥은 여기에 있었다. 종래엔 위무선에게서 나는 혈향과 자신의 몸에서 나는 혈향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꿈과 현실의 구분은 점점 모호해져 갔다. 잠에서 깨어있을 때도 끊어져 가는 숨소리나 피에 젖은 소맷자락이 아른거렸다. 때로는 이것이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손을 잡지 못한 벌. 편견에 사로잡혀 진실을 보지 못한 벌. 차라리 그랬다면 기꺼이 이 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매일 밤 찾아오는 악몽은 자신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자학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해와 수용은 다른 것이라고, 그것을 안다 해서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망기는 점점 죽음에 매몰되어가는 자신을 바라봤다. 면경 속의 얼굴은 생기가 하나도 없어 흡사 잘 만들어진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아 소름 끼쳤다. 어쩐지 조금은 그와 닮아진 것 같다. 시야 끝에서 붉은 끈이 흩날린다. 다시 너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희미하게 보이는 면경 속의 얼굴은 미소 짓고 있었다.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된 이후론 혹여 또 돌발행동을 하지 않을까 가문의 사람들은 우려했지만, 걱정과는 달리 남망기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수련을 하고, 데려온 아이를 돌보고, 가문의 일을 돕고, 매일 밤 문령을 했다. 구슬픈 문령 소리가 운심부지처를 맴돌 때면 어떤 자들은 함광군이 죽은 자들을 추모하는 거라 했고 어떤 자들은 이릉노조가 부활하지 못하게 막는 것을 거드는 거라 말했다. 한때는 치부로 취급하며 숨기려 급급하던 일이 미담이 되어 돌아다니니 촌극이 따로 없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문의 당사자는 정실에 틀어박혀 그저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살아갔다.

  받을 자 없는 연가는 되돌아오지도 못하니 결국 매일 밤 되풀이되기 마련이라. 남망기는 문득 바라고 마는 것이다. 문령에도 답이 없다면 정말로 죽지 않은 것이 아닐까. 죽은 자 중에서도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이것은 운신이 힘들어 숨어있을 뿐 살아있는 게 아닐까. 그런 알량한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죽음은 남망기를 떠나지 않았다. 지칠 때까지 문령을 하다 가까스로 잠이 들면 눈앞에선 위무선이 죽었다. 그러다 문득 남망기는 자신이 내심 이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비록 끝은 죽음일지라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어리석은 행동이라 말할지라도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 너를 잊지 않아. 너를 잊지 못해. 품속에서 위무선을 놓치며 잠에서 깰 때마다 남망기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너의 손을 잡았어야 했는데.

 

  그날은 평소와는 달랐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평화로운 숲속에 남망기는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평온한 분위기에 뒤늦게 알아챘지만, 이곳엔 남망기를 제외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꿈의 시작에 위무선이 없던 적은 있어도 이렇게까지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경우는 없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남망기는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봤다. 숲속은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적막한 숲속은 햇살이 드리우고 있음에도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감돌았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숨이 가빠진다. 설마, 더는 꿈을 꾸지 못하는 걸까. 나는 이제 꿈에서조차 너를 보지 못하는 건가. 너를 잊어버리며 그렇게, 나 홀로 남는 걸까.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햇볕이 따듯하게 남망기를 감싸고 있었지만,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다신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남망기가 절대 잊지 못할 소리였다.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소리를 인식한 그 순간부터 몸은 달려가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머리카락이 엉키고 옷자락이 걸리는 감각이 묘하게 실감적이다. 검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이번 꿈속의 자신은 맨몸이었다. 달려갈수록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숲길 너머로 한 인형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인 남자는 넓은 돌 위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숲 안쪽은 바람 한 점 없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피리 소리에 맞춰 바람이 춤을 췄다. 흔들리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머리끈이 인상적이다. 드러난 손목은 여전히 말라 있었다. 예전의 살기와 분노가 가득했던 모습이 아닌, 평온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모습에 남망기는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한때는 분노에 가득 차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던 피리는 부드러운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어딘가 흥겹기까지 한 가락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리 머지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어쩐지 옛 풍경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가가면 피에 젖어가며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남망기를 발견한 것인지 남자는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두 시선이 마주쳤다. 얼어있는 남망기를 보며 그는 밝게 웃었다. 위무선이다.

  “이런 표정이 왜 그러실까. 죽은 부인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네!”

  위무선은 살려달라 하지도, 꺼지라고 소리치지도 않고 남망기를 보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날이 좋다며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술은 마시는 모습이 현실감 없었다. 남망기를 부르는 손짓이 자연스럽다. 남망기는 꿈속의 위무선들의 끝이 생각났지만, 그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남망기의 심정을 알긴 하는지 위무선은 남망기가 자신의 근처에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오히려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남망기는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위무선은 맑은 목소리로 쉬지 않고 말했지만, 귀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그저 멍했다.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남망기를 보며 위무선은 여전히 말이 없다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평화롭다. 그렇게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그리워했던 사람과 싸울 일 없는 평온한 장소. 그토록 원했던 순간임에도 이 평화가 참을 수 없었다. 벅차오르는 이 감정이 뭔지 정의할 수 없었다. 너의 손을 놓쳐버린 자신이 이렇게 마주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너는 어째서 내 곁으로 와준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옆에 있는 이 존재는 위무선이 맞았다.

  “내가 찾아온 게 궁금한 표정이네.”

  위무선이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손가락을 흔들며 말하는 모습이 장난기가 넘쳤다.

  “으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오늘은 내겐 나름 특별한 날이거든. 근데 알다시피 운몽으로 가기엔 좀 그렇잖아? 강징 성격상 가면 분명 노발대발 화내면서 발로 내쫓을게 뻔하단 말이지. 그래서 어디로 갈까 고민했는데 문득 네가 생각나지 뭐야. 그래서 왔지!”

  내가 생각났다고? 전혀 생각도 못 한 대답에 남망기는 딱딱히 굳어버렸다. 위무선이 자신이 생각난다고 하다니. 위무선만큼 자신을 보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이봐 망기형, 왜 그런 표정이야.”

  “난… 네가 나를 보기 싫어할 거라 생각했어.”

  “뭐야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어? 중요한 건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라고 남잠. 너와 내가 대화를 할 수 있단 사실이지. 무려 검이 아니라 말로 말이야!”

  나에게 선택받은 걸 기뻐하란 말이야! 어이없단 표정으로 뻔뻔하게 말하던 위무선은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변하는 분위기가 정신없었지만, 그것이 위무선다웠다.

  “흠,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일단 내가 묻고 싶은 건 정말 많거든? 근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별로 없어요~그러니까 한 가지만 물어볼게. 어떻게 지냈어?”

  어떻게 지냈냐고. 내가. 네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지냈냐고. 뭐라 말해야 할까.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많았지만,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네가 죽은 이후로 강만음은 연화오를 재건했어.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강염리의 아이인 금여란은 운몽과 난릉이 합쳐서 지키고 있어. 난장강의 사람 중 아원이라 불리던 아이는 살아남았어. 지금은 고소 남씨의 방계로 입적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의 연구 결과들은 뿔뿔이 흩어져 세가들의 전리품이 되었어. 기산 온씨는 결국 멸문됐어. 세간에선 너를 천하에 둘도 없는 십악불사의 여귀사신이라 말하고 다녀. 네가 다시 돌아오지 못 하도록 수많은 수사가 봉인진을 펼쳐 감시하고 있어.

  전해줄 말은 많았지만 하나도 말할 수 없었다. 새삼스레 말주변이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답답함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옷자락이 구겨지며 의복이 흐트러지는 것이 보였지만 힘을 푸는 순간 이 나약한 입은 모든 걸 말해버릴 것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의복을 꾹 쥐고 있는 남망기를 보며 위무선은 가볍게 한숨 쉬었다.

  “내가 너무 힘든 질문을 한 거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남잠. 어떨 땐 말하지 말래도 잘만 말하더니 평소엔 한마디 듣기가 이렇게나 힘이 든다니까.”

  “그건…!”

  “괜찮아, 지금은. 네가 날 싫어하지 않았다면 그걸로 됐어.”

  부드럽게 웃고 있는 위무선의 눈빛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듯이 남망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새 술병을 다 비웠는지 술병을 흔들어보던 위무선은 술이 나오지 않자 그대로 돌 위에 드러누웠다.

  “있잖아 남잠. 북쪽에선 매년 풍등을 강물에 띄우는 축제를 한 대. 만약 풍등이 꺼지지 않고 바다까지 간다면 풍등에 담았던 소원이 이뤄진다는 거야. 축제를 할 때면 그곳의 강은 별들이 흘러가는 것 같다고 누가 그러더라고.”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청자는 답이 없었지만, 화자는 재촉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던 위무선은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기라도 하듯이.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다음에 또 이렇게 만나게 된다면 그땐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가려진 소매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졌다. 소매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남망기는 위무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의 표정도 똑같을 테니까.

  “응, 같이 가자.”

함께 그리는 미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목이 멨다. 조금 더 일찍 이렇게 마주했었다면 우리의 결말은 달라졌을까. 지나간 날을 반추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지만 미련을 놓기엔 그는 아직 미숙했다. 잠시 답이 없던 위무선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정돈했다.

  “좋아, 이제 가야 할 시간이군. 오늘 즐거웠어.”

개운한 얼굴로 말하는 위무선의 모습에 초조해졌다.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나는 아직 널 보낼 수 없는데. 목 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이물감은 기도를 타고 입안에서 맴돌았다. 곧이어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말의 형태를 하고 튀어나왔다.

  “가지 마.”

  두 눈이 놀람을 가득 담고 커졌다. 위무선은 뒤로 넘어갈 듯 크게 웃으며 숨을 헐떡였다. 그 모습에 부끄러웠지만 부끄러움보다 간절함이 더 앞섰다. 짧은 수치로 널 잡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하리라.

  “세상에 날 잡는 남망기라니! 이런 모습을 나만 보다니 너무 아쉽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너도 알고 있잖아?”

  그 말을 들으니 남망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서. 그래서 여태 그리워하고 고통받지 않았었나.

  “그러니까….”

  평소와는 달리 말을 줄이던 위무선은 이내 미소 지었다. 씁쓸한 미소는 어딘가 후련하게도 보였다.

  “잘 지내야 해 남잠.”

  위무선의 손가락이 장난스레 남망기의 어깨를 밀쳤다. 밀었다기보다 툭 건드렸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가벼운 손짓이었지만 남망기는 무언가의 힘에 떠밀리듯이 뒤로 밀려났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멀어졌다. 점점 작아지는 위무선의 모습에 손을 뻗어봐도 손바닥 아래 가려진 모습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땐 창문 밖에서 스며드는 햇빛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방안의 풍경은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남망기는 다신 악몽을 꾸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위무선이 남망기에게 다음을 기약한 이상 그는 이제 꿈을 꿀 필요가 없었다. 과거에 매달릴 시간은 끝났다. 이젠 앞으로 나아갈 때다. 그렇게 걷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함께 북쪽으로 가자. 강을 따라 걸으며 다 못한 이야기를 하자. 아, 찬란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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