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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

  “선 형아.”

  밭일을 막 끝내고 돌아온 위무선의 다리에 기다렸다는 듯 온원이 착 달라붙었다. 이 아이는 사람을 기다리는 건지 매달릴 사람의 다리를 기다리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수수한 차림에 온통 흙으로 더러워진 채 단단히 한쪽 다리를 붙들린 위무선은 허리를 굽혀 온원의 곁에 쪼그려 자리 잡았다.

  “아원. 여기서 삼촌이랑 잘 놀고 있었어?”

  “응. 녕 형아가 놀아줬어.”

  반가움에 온원은 끄덕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엔 밭에 무처럼 파묻히거나 나무에 밧줄로 매달리는 대신 난장강에 흔하디흔한 흙을 그러모아 성 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래로 된 성 한가운데에는 눈에 익은 장난감 한 쌍이 꽂혀 있었는데, 꼭 성 꼭대기에 꽂힌 깃발 같았다. 희한하게도 이 아이는 지난번 예의 나비 모양 장난감을 손에서 잠시도 떼어놓을 생각을 않았다.

  “그 장난감이 그리도 마음에 들어?”

  “응!”

  “아이구, 어쩐다냐. 뭐 다른 거 더 갖고 싶은 건 없고? 원하는 거 있으면 뭐든 말해 봐봐.”

  위무선은 아이가 쌓던 모래성을 거들며 더욱 단단히 흙을 보태고 있었다. 천으로 대강 훔친 두 손이 도로 더러워진들 개의치 않았다. 온원은 입술을 모으며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한 마디만을 덜컥 꺼냈다.

  “…전에 봤던 돈 많은 형, 언제 돌아와?”

  겨우 말을 붙이면서도 온원은 꼭 무언갈 크게 잘못한 사람처럼 우물쭈물했다. 위무선은 어김없이 올 게 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요 녀석이,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그리 일러뒀건만… 걸핏하면 돈 많고 잘생긴 형 이야기네. 너 이렇게 자꾸 떼쓰면 안 돼. 알겠어? 선 형아는 이렇게 널 가르친 적이 없단다.”

  하물며 사내가 이리 속물적으로 굴면 나중에 여자애들한테 정떨어질 거라는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이며 그는 빈정거렸다. 분명 잘생겼다는 말은 속으로 생각만 하고 아직 내뱉은 적이 없는데 보란 듯 그가 더 보태 뒤집어씌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건만 온원은 제법 억울해 보였다.

  위무선은 몇 마디를 내뱉으며 그를 못 본 체하려 했는데, 그래도 어련히 켕기는 게 조금은 있던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해보는 듯했다. 그러자 인근의 마른 나뭇가지를 가져와 아이 눈앞의 흙 위에다 성의 없이 동그라미 하나랑 줄 몇 개를 죽죽 내리그었다.

  “자자, 여기 봐봐. 완전 똑같이 생겼지.”

  “하나도 안 닮았어!”

  온원은 오직 외마디로 냉엄한 판단을 내리더니 양 볼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어떻게든 대충 이 상황을 모면해보려 했던 위무선은 흙바닥만 쏘아보던 온원의 침울한 눈빛을 훔쳐보더니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기다려보라는 말을 남긴 후 그는 복마동으로 들어가 간밤에 자다가 일어나 쓰느라 적당히 휘갈긴 몇 점의 원고를 돌 침상 바깥으로 밀어버리고, 어지러운 물건들 사이에 하얀 화선지와 붓 한 필을 겨우 건져냈다. “으음… 남잠이 어떻게 생겼더라. 너무 오래 안 만나서 원. 소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들 하는데, 지금에 와서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리가. 하여간 눈이 참 부리부리하단 말야 걘.” 소원해졌으니 얼굴이 자세하게는 안 떠오르는 것도 별수 없다며 투덜투덜 온갖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먹을 갈고는 한참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자 그제야 동굴 바깥으로 주섬주섬 다시 나타났다.

  위무선이 건성으로 얼굴 앞에다 팔랑팔랑 흔들던 종이로부터 온원은 시선을 떼지 못하며 눈을 빛냈다. 온원은 순수히 감탄하면서 두 팔을 뻗어 그림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종이에 들어가 버릴 지경이었다.

  “와아, 선 형아!”

  “왜 불러?”

  “이거……, 나 주면 안 돼?”

  “싫어. 안 줄 건데. 내가 누구 좋으라고? 너 아까는 하나도 안 닮았다고 했잖아. 내 실력을 우습게 여기더니… 설마 한입으로 지금 두말하는 거야?”

  위무선은 일부러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자 온원은 위무선의 심술에도 굴하지 않고 저 나름에는 참느라 처음엔 찔끔 눈물만 맺히더니, 슬슬 정도를 모르고 계속해서 위무선이 갈구자 결국 머지않아 울음을 터트렸다.

  “우애애앵, 애애애애애앵…….”

  “에구머니나, 이렇게 쉽게 울고 말야. 우는 아이한테는 이릉노조가 다시는 선물 안 준다? 대신 엄―청 나이 많은 선인 할아버지가 밤마다 꿈속에서 수면 위에 나타나 이놈! 할 거야. 어때, 완전 무섭지! 앞으로 잠들 때마다 엄마 꽁무니 찾느라 울고불고 호들갑이라도 떨면 어쩌냐?”

  “어린 애 구박 좀 그만해! 대체 나잇값 못하고 뭘 하는 거야?”

  중간에 끼어든 관중, 온정은 유치하기 짝이 없게 구는 위무선만을 가차 없이 나무랐다.

  “얘 하는 것 좀 봐. 아원이 아까부터 자꾸 떼를 쓰니 어쩔 수가 없네. 말 안 듣는 애는 고소에 몇 년 청학이라도 보내야겠어. 그 집안 사람들 예절교육 하나는 끝내주니까 하루아침에 사람이 환골탈태할걸? 이 내가 산증인이잖아.”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당장 너부터 인성교육 다시 좀 받고 오는 게 어때.”

  “아이고, 소생이 잘못했습니다, 백가에서 제일가는 명의이신 온정님. 우매한 자, 다시는 감히 주제를 모르고 경거망동하지 아니하겠습니다.”

  팔짱을 낀 채 눈썹을 꿈틀거리는 온정의 기세에 눌린 위무선은 결국 입으로라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애먼 어린 애 괴롭히지 말고 네가 사람들 앞에서 잔재주라도 부려 봐. 그 잘난 흑피리라도 불어보든가. 어찌나 이렇게 생활력이 없어서는.”

  “내가 진정만 들면 산 사람 죽은 사람 막론하고 십 리 밖으로 다 달아날 텐데?”

  “어휴, 하여간 재앙을 부르는 요 입방정이…! 이 가벼운 주둥이에 마취침이라도 몇 방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아니아니아니, 됐어. 기다려 봐.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저쪽 편 밭도 다 갈았으니 이제 씨만 뿌리면 될 거야. 차라리 장이나 보러 가는 게 낫겠어. 마침 호부護符에 쓸 주사朱砂도 얼마 전에 다 떨어졌거든. 작물 씨앗이랑, 찻잎이랑, 또 뭐 필요해? 뭐든 다 말해 봐.”

  “그렇게 핑계나 대면서 술이 마시고 싶은 것뿐이잖아. 네 그 알량한 속셈을 모를 줄 알고?”

말은 매섭더라도 온정은 그를 강하게 뜯어말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온가 남매가 그동안 위 공자에게 진 마음의 빚이 몹시 컸다.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던 위무선은 헤픈 티를 풀풀 풍기며 예비용으로 쓸 부적 몇 장을 챙기는 등 난장강 산을 내려갈 채비를 했다. 실은 그에겐 아직 못다 한 일이 있었으므로.

 

 

  일일 심부름꾼, 이라는 핑계를 대며 인근 마을까지 하산한 그는 그간 건넛마을로부터 성불하지 못한 귀신과 사령들의 출몰 제보를 간간이 받았던 터라 간만에 길을 나섰다. 인근에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금단을 맺을 만큼 영력이 강한 수사가 드나들지 않았던 탓에 만에 하나 어려움을 겪어도 털어놓기 어려웠으므로, 마을의 경계이기도 한 법진 안에 미처 그가 단속하지 못한 영이 있나 한 번 더 둘러보고는 미리 온가 사람들이 사오란 것도 잘 챙기고 어지간한 용무를 마친 이후였다.

  “그럼 이제 본전을 찾으러 가볼까.”

  난장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 민가 사이에 허름한 주막이 있었다. 세간이 알아주는 주당이었던 그는 이미 그 가게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단골이었다. 아무래도 운몽의 넓고 깔끔한 객잔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일전에 사일지정의 영웅이라며 뭇사람들이 그를 추앙할 적 그 이름값에 걸맞게 어쨌거나 사람들이 그에게 자리는 마련해 주었지만 이후 그와 강 종주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금세 그가 머무는 곳곳마다 사람을 물려버리느라 그의 주위가 늘 적적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릉노조 위무선은 소란하고 시끌벅적한 게 좋았다. 들어가 죽은 듯 잠을 자는 복마동이 그러하듯, 성미에 맞지 않게 괴괴한 건 참 몇 살을 먹고도 몸서리치게 싫었다.

  멀찍한 곳에서 안쪽을 기웃거리던 그는 바람을 타고 은은히 감돌던 주향에 홀린 듯 다가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두 발은 주막 문 앞에 딱 붙이고서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하여간 참새는 방앗간을 절대 그대로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술은 오늘까지야. 내가 오늘까지만 딱 마시고 하늘이 두 쪽 나도 내일부터 반드시 끊는다!”

가벼운 목소리로 다음에도 지키지 못할 결심을 내지르더니 이대로 취생몽사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며 아주 콧노래까지 부르며 주막에 들어갔다.

  “크, 자고로 이 맛이지! 그래도 역시 제일은 고소의 천자소일지언대, 이렇게 먼 곳엔 있을 턱이 없으니. 거기 주인장은 하여간 무슨 신묘한 방법으로 술을 빚는지… 악마한테 혼을 팔아오기라도 했나. 이렇게 맛 좋은 술도 있겠다 여기에 미인만 있으면 딱…….”

위무선은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라, 실물이 나타났네?”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창 너머로 스치던 이 미인을 어찌 꼬드길지 고민했다. 고집 깨나 세 보이는 미인, 남망기와는 일전에 운몽에서 만난 후 우연히 이곳 이릉 일대에서 마주친 게 마지막이었다.

  지난번에 그의 기분을 돋우고자 큰맘 먹고 예쁘장한 여자애들을 잔뜩 불러들였더니 이 수도승 같은 자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기에 같은 방법은 쓰지 않기로 했다. 가만 보니 자신이 던진 꽃은 어떻게 됐더라. 입으로는 돌려주겠다면서 은근히 마음에 들어 했던 것도 같던 지난 일이 떠올랐다.

  후줄근한 주머니를 뒤적이던 위무선은 구겨진 종이 몇 뭉치밖에 없었던 탓에 그 내용물을 탁자 위에다 볼품없게 늘어놓았다. 이 미인이 아예 걸음을 뜨기 전에 나름의 기지를 발휘하던 그는, 종이를 뭉쳐 끝이 뾰족한 타원형의, 꼭 식물의 씨앗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그 안에 자신의 피 한 방울을 떨어트리자 자연현상처럼 피가 원 모양 형체 그대로 번지던 것이 아닌, 마치 살아있는 잎맥을 타고 스며드는 물처럼 수 갈래로 뻗어 종이에 퍼져나가던 것이었다.

  붉은 점을 머금은 종이 뭉치를 모처럼 바람에 태워 그 앞에 보내두었더니, 남망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쓰레기 비스무리한 불가사의의 물체가 눈앞에 보이자 걸음을 늦추었다. 수상쩍은 기척을 눈치챈 그가 마침내 손을 뻗으려던 그 순간, 위무선은 두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더니 그 소리와 동시에 종이 뭉치가 벌어지면서 그 속에 머금은 붉은 빛깔은 살아있는 꽃봉오리가 되어 급속도로 피어올랐다. 꽃잎이 돋아나며 꽃술이 자라는, 한껏 피어오르는 꽃의 일생을 일순간에 본 남망기는 눈만 몇 번 끔뻑거렸다.

  마침내 이 꽃송이를 거두자 그동안 걸음을 늦추던 그는 길목에서 제 쪽을 돌아보았다. 남망기를 마주하던 위무선은 호쾌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막상 첫마디로써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만 보니 그와는 결국 마지막에 언제나 언…짢게 헤어졌던가? 이미 다 지난 일이니 이젠 잘 떠오르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지난 날들의 가시지 않은 앙금쯤은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자 위무선은 그를 향해 팔을 크게 흔들었다.

  “이야, 함광군, 그간 잘 지냈어?”

  “음.”

  “아까 아원이 널 보고 싶다고 하더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 알았더라면 같이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 녀석, 꿈에서 미래라도 본 건가?”

  “…….”

  유감스럽게도 남망기는 한담에 영 소질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의 제안에 응할 생각은 있던 모양이었는지 가게 안으로 묵묵히 걸어오는 그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위무선은 설핏 웃었다.

  오직 단정한 흰 의복만을 갖추는 그와 온통 검은 차림인 자신, 그 앞에 맑은 엽차가 놓이고 제 앞에 술잔이 놓이는 양상은 참으로 함광군과 이릉노조라는 호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았다. 순백과 칠흑, 호젓한 자와 방종한 자가 마주한 모습은 하늘과 땅, 마치 구름과 진흙만큼의 차이이거늘. 그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명백히 반대였기에 혀 끝에 닿는 술맛이 점점 엽차만큼이나 흐려지는 착각이 들었다. 습관이나 취향의 차이 같은, 어찌 보면 살아가는 데 있어 크게 중요하지는 않은 이런 하잘것없는 것들의 연장선에서 그 차이란 것은 의외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지라 그와 자신은 어지간히 풍격이 다름을 새삼스럽게 절감하자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 막막히 이어졌다.

  “차는 어때, 입맛에 잘 맞아? 이 집은 술은 괜찮은데 차 맛은 어떤지를 내가 잘 몰라서.”

  양 소매를 간수하고는 점잖게 두 손 모아 잔을 잡던 그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아까 아원한테 네 옛날이야기를 좀 했어. 애가 어찌나 조르던지… 내가 몇 마디 놀렸더니 금세 울음을 터트리는 게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 네가 친히 그 꼴을 봤어야 하는데…….”

  “응.”

  “그래도 우리들 옛날 생각 하면 그 나름 동창 비슷한 거 아닌가? 이참에 허심탄회하게 그동안의 회포라도 풀자고. 너도 어쩌면 얼굴 못 본 새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지.”

  하여간 본전만 찾으면 매번 그와 언짢게 끝나니 차라리 본론은 꺼내지 않는 선택을 했다. 과연 어느 정도는 현명한 선택이었을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생판 남인 그와 굳이 내외하는 꼴이 조금은 우스웠다.

  실은 그는 그동안 남망기를 대하는 게 어려웠다. 물론 세상 상당수의 사람이 그를 어려워했으나 그들과는 약간 다른 문제였다. 그는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완전히 인지하는 것도 아닌 늘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그와는 그 나이대 철없는 소년들마냥 한번을 제대로 싸우기라도 했던 게 나았을지도 모르나, 사람들의 입방아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화해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한 번이라도 끝을 보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위무선은 그를 만날 때마다 그전 일은 싸그리 잊은 양 금세 세상에 둘도 없을 친우처럼 남망기한테 친근하게 굴었으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도 그러했다.

  실속 없이 몇 마디를 지껄이던 그가 마침내 입을 다물자, 이따금 무언가를 마시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위무선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씁쓸히 웃었다. 다시 돌이켜봐도 그와는 참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았다.

  “그때 내놓았던 답.”

  “응?”

  “…난, 네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날따라 남망기는 어울리지 않게 허술히 말했다. 수업시간에 그가 혼쭐이 나 난실 바깥으로 쫓겨났을 적의 일, 이야기가 벌써 그 시절까지 다다랐던가. 그 일을 그리도 신경 쓰고 있었다니, 의외라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뜬 위무선은 별수 없다는 듯 한가하게 대꾸했다.

  “네가 맞아, 그건. 네 답은 아주 정론이지. 그땐 남 선생 열 받게 만들려고 헛소리 좀 해본 것뿐이거든.”

  심드렁하게 답한 위무선과 달리, 남망기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답, 남이 가르쳐준 답만을 앵무새마냥 따라 읊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선연했다. 속세를 헤매는 중생을 교화하여 바른 길로 이끈다는 도화度化란… 진정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인가? 비록 행복한 사람의 모습은 어느 정도 닮아있을지언정 불행한 사람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불행하거늘 어찌 신도 아닌 한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감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 시점부터, 그동안 의심 없이 믿어왔던 세계란 것에 남망기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 증거로 이릉노조의 갖은 수모 앞에 함광군은 너무도 무력했다.

  “하지만 숙부의 말씀도 일견 맞아.”

  “…….”

  “사도의 술법은, 운용하는 자의 주위 사람마저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 어쩌면 다음번에는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잃게 될 수도 있어.”

  위무선은 할 말을 잃었다. 무뚝뚝한 그의 앞에서 달변가인 그가 먼저 말문이 막힐 거라곤 차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자는 결국 또 같은 설교를 늘어놓을 셈이었던가. 그럴 적마다 번번이 냉대를 당하면서도 넌더리가 날 정도로 그는 참 인내심이 대단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어. 역시 남 둘째 공자는 걱정이 너무 많은걸.”

  그는 내내 홀짝이던 술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난, 지금껏 내 길을 스스로 개척해오며 살아왔어. 결국 인생 살아보니 영원한 내 편이란 것은 어디 소설에서나 나오는 허상이었기 때문이지.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정당한 이유 없이 내 앞을 가로막는 녀석들은 설령 그자가 하늘에 비견할 선인일지언정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며, 난 무슨 일 앞에서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따라서,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 따윈 영원히 오지 않아.”

  그는 심기 불편한 말만 골라가며 하고 있지만 자신까지 그를 진심으로 언짢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말을 이어가면서도 점차 입안이 마르느라 견디기 힘든 기분이었다. 그날따라 술기운이 빨리 돌던 탓에 위무선은 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미간이 좁혀지며 한쪽으로 기우는 제 이마를 한 손으로 짚자 반사적으로 내뻗은 남망기의 손은 갈 곳을 잃은 채 공중에 머물렀다.

  ‘끈질기게도 그가 간섭하는 모양이군.’

  ‘성가신 자, 민폐인 줄도 모르고.’

  ‘제까짓 게 뭐가 그리도 잘났다고 훈계질인지.’

  ‘하여간 흠결 없는 사람은 재수가 없어. 산 사람 같지가 않잖아.’

  ‘이참에 저자의 목을 졸라버리는 게 어때? 다시는 허튼소리 못 지껄이도록!’

  ‘저 눈을 뽑아버려야 닥칠 셈인가.’

  ‘죽여. 그를 죽여버려!’

  또 그 소리인가. 위무선은 인상을 썼다. 요즘 들어 원혼들이 부르짖는 소음이 점점 더 잦게 들려왔다. 어찌 보면 사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 시점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했다. 결국엔 자신을 더 많이 내어 주어 그들의 힘을 빌리는 일이므로 그들에 점점 더 공명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끄러워.”

  그의 싸늘한 발화를 들은 순간 남망기는 석상이라도 된 듯 얼어붙었다.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힌 채 내뱉은 한 마디에 소음이 끊기자 위무선은 겨우 평상의 여유를 되찾았다. 음성에는 힘이 있어 피리 대신 목소리로 일시적인 명령을 내려 삿된 기운을 억누른 것이다.

  “네 기우대로 진정 그럴 수도 있겠지. 넌 반드시 정만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상황에서든 결코 그릇된 행동은 하지 않아. 우리가 담을 넘었을 적 네가 나로 인해 말미암아 처벌을 받았을 경우도 그러했지. 그런 네가 날 염려하는 것도 이해해.”

  그동안 술이 이미 많이 들어간지라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하면서도 확신에 찬 위무선의 어조와 달리 얼어붙었던 남망기의 눈빛은 점점 그늘을 드리웠다. 그가 끊임없이 가라앉는 줄도 모르고 위무선은 무언으로 한참 골똘히 생각하더니 그제야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한때는 생사지교의 연분이 적지는 않았으니, 특별히 너한테만 기회를 줄게. 앞으로 네가 이른 것처럼 본 이릉노조가 그 주위 사람을 해치게 된다면, 진정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면…….”

  “…….”

  “그땐 네가 날 멈춰. 무슨 수를 써서든. 내 수양이 아무리 대단한들 너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칼날 같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습관처럼 미소짓던 그 앞에서 황망하게 뜬 옅은 두 눈동자에는 짙은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렇게 두뇌명석한 사람이 못 알아들었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망기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공황에 빠졌다.

  세상에서 제일 공명정대하고,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며, 누구보다도 신뢰할 만한 사람한테. 그는 분명 그럴 가치가 있었다. 실은 아주 오래전 냉천에서의 그 일은 아직까지 조금 마음에 걸렸기에 위무선은 그 시절의 빚도 갚을 겸 아주 잘 내린 결정이라고 혼자 뿌듯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털어 넣고 위무선은 자리를 박차려 했다. 모처럼 이번에는 두 사람분의 술과 찻값을 그가 치르려 했더니 세상일 정말이지 사람 마음먹은 대로 되어 주지는 않았다.

  “이번엔 진정 돈이 있었을 텐데? 그새 다 써버렸나? 이 주머니엔 무슨 구멍이라도 났나, 뭐 이리 빨리 떨어진담. 어휴…… 아니아니, 함광군. 넌 다 마시고 느긋하게 와도 돼. 괜찮아.”

  위무선의 방정맞은 손을 굳게 잡던 남망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돈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내 값을 치르던 것이었다.

  “아하하… 함광군. 역시 넌 군자가 따로 없군! 준수하고, 예의 바르고, 이렇게 집안에 돈도 많고 배경이 좋아. 무척 성실하고, 한 말은 반드시 지키며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지. 넌 턱 끝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그를 배반하지 않을 거야.”

  “…….”

  “그런 행운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네가 맞을 여인은 행복하겠는걸. 그도 그럴 게, 벌써 그럴 나이잖아.”

  지난번 자신은 끝내 참석하지 못했던 사저의 혼인을 멋대로 상상하며 위무선은 엷게 웃었다. 시선을 돌린 남망기는 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주막 바깥으로 몇 걸음 나서자 두 사람은 갈림길에 선 채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헤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잠자코 있던 그는 조금 주저하며 입을 뗐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 좀 전까지 무슨 이야기 했더라?”

  “……혼사에 관한 것.”

  “흐음, 난 또 무슨 말이라고. 뭐 나한테도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 그런데 보다시피 영… 내가 시원찮아서, 차라리 네 혼례식에 하객으로 참석하는 게 더 재밌겠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분위기 띄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잖아. 운심부지처는 금주라니 술은 없어도 진수성찬이 펼쳐질 것이며. 아니, 보자…… 너희 집 어르신들은 유구하게도 날 못마땅하게 여기니 대문도 못 들어가 보고 금세 쫓겨나려나?”

  실없이 온갖 너스레를 떨던 위무선을 가만 지켜보던 남망기는 유달리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였으나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도 크게 다투지 않았으며, 별 영양가 없는 공통의 관심사 이야기나 떠들며 무사히 헤어지는데… 그는 어쩐지 서글픈 낯을 하고 있었다. 함광군의 얼굴에 평상 감정이랄 게 스칠 리 없을 터인데 묘하게도 그리 느꼈다.

  적어도 술시까지는 난장강 중심 쪽 본 근거지로 돌아가야 했다. 특히 밤에는 작간을 서슴지 않는 귀신이나 요괴가 들끓느라 지난번처럼 무슨 돌발상황이 벌어질지 예측 불능했으므로, 소싯적 수사들처럼 현재의 그는 어검으로 쏜살같이 날 수도 없으니 아마 지금 출발해도 적잖게 빠듯할 것이다.

  아마 일순 담긴 그의 표정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양 풍파에 곧 잊힐 것이다. 단 하나 아쉬웠던 점은, 기왕에 큰 마음 먹고 들이켰던 술맛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 하나였다.

 

* * *

 

  그가 입에 담았던 기회란 아마, 함광군 남망기가 이릉노조 위무선의 혼백 한 점까지 그 존재를 온전히 멸절하여 비로소 사를 정으로 돌리는 일을 말했던 것일 테다. 어쨌거나 남망기는, 당사자는 변덕스럽게 내뱉고 뒤돌아서자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그 말을 완고하게 지켰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부여잡아 세우고, 다시는 없을 연인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메마른 뺨을 감싸고, 세간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업화를 견디며 신실하게도 그를 살폈다. 하지만 창백한 그의 피부에 이전의 온기라고는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 부르는 그 이름은 이따금 너무도 무거워 억눌린 채 목에 걸려 나오지 못할 뻔했다. 겨우내 뱉은들 참 볼품없는 모양새였음에도, 제 이마를 맞대던 그는 끈질기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월을 겪을수록 그의 웃음은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연기처럼 서서히 사라져갔다. 점차 농도가 옅어지는 미소들 속에서도 그가 이따금 웃어 보일 때면 결국 머지않아 그는 전신마저 종적을 감춰버리고, 달콤한 말을 할 때면 일순 걷잡을 수 없는 황홀경에 젖어 들었으나 알고 보면 그 본질은 대부분 허식이었으며, 어쩌다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싶을 적에는 번번이 실패해 그와의 관계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어둠에 자연히 자취를 감추는 달그림자처럼, 마치 자연의 섭리와 같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저 앞의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광분하여 날뛰는 이릉노조를 드디어 멈추러 왔으리라 생각한 그는, 냉혹하고도 무표정한 그를 오직 감싸고 돌던 남망기는 기어이 그의 친족들을 향해 적반하장으로 검을 겨누던 것이었다.

  간절한 바람에 어렴풋이 나타날 때마다 그는 웃는 모습으로 사그라들었다. 태양에도 부식되지 않던 찬란한 그 미소가 그리도 쉽게 스러지는 것이었다면, 진정 자신이 너무 대단한 걸 그에게 요했던 것이었더라면 차라리 다시는 그가 힘겹게 웃지 않더라도 좋았을 것을. 나약한 제 힘으로는 그를 미소짓게 할 수 없더라도 그가 원치 않는다면 더 이상 제 앞에서만큼이라도 무리하게 밝은 척은 하지 않길 바랐다. 비록 이전의 무탈했던 시절처럼 그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좋은 사람에는 부합할 수 없어도 얼마 안 되는 값진 추억마저 온통 회한으로 얼룩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으리라.

  비록 이 마음은 피 흘릴지언정 그가 겪어온 업에 비하면 크게 가엾지 않았다. 세간의 이 모든 일들이 오롯이 그가 감내해야 할 몫이라면 부디 반절이나마 그와 나누기를 기원했다. 마치 해가 가라앉으면 밤의 장막이 드리운 그 자리를 고고히 지키는 달빛처럼, 그의 어두운 그림자 곁이라도 머물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초라한 바람이었다.

 

* * *

 

  이마에 뙤약볕이 내리느라 눈이 부셨다. 채의진의 어떤 가게를 들러 개인적인 용무를 마치던 그가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그날따라 남자는 한낮부터 기묘한 감상에 빠지기라도 했는지 굳이 말을 얹고 싶던 모양이었다.

  “공자님은 희한하게도 초장부터 항상 그것만 고르시더구먼요. 세상에는 다른 더 좋은 술도 많이 있을 텐데.”

  “…….”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영판 하실 것 같지는 않은 게… 어디 어여쁜 낭자께 선물이라도 줄 작정인가 보오? 누군지는 모르겠어도 그 아씨는 참 좋겠수다.”

  “……예.”

  고요한 못처럼 차분하던 그는 짐짓 한 박 늦게 답했다. 여전히 무정하고도 미온적이기 그지없던 목소리였다.

처음 그를 조우했을 적을 떠올려보면, 주인장은 별안간 사람 비스무리한 어떤 그림자 같은 형상을 목격한 듯했다. 눈 씻고 쳐다봐도 이 자가 도대체 속세의 인물이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던지라 그날은 백일몽이라도 꾼 것 같았다. 워낙에 특이했던 손님이었던지라 그에게 몇 번인가 말은 붙여보았지만 그는 생면부지의 사람과 한가하게 담소나 나누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보여 항상 그와의 대화는 필수불가결한 한두 마디로 간결히 맺게 된다.

  예의 손님은 여전히 고상한 낯을 하고는 술값을 치르느라 그와 영 어울리지 않은 촌스러운 색깔에 너저분한 돈주머니를 꺼냈다. 이는 어쩐지 희한하게 상당히 유서 깊고도 그리운 느낌을 주었는데, 그를 접객하던 점원 아가씨는 괜한 참견을 해 보고 싶어졌다.

  “공자님. 그 주머니 참 오래된 물건인가 봐요. 이미 많이 낡았는데…, 제가 이 비슷한 것들 파는 곳을 알고 있어요.”

  “…….”

  “어렸을 적 소꿉친구의 부모님께서 장인이신지라 3대째 하고 있는, 꽤 내력 있는 가게인데… 이 골목 지나면 있는 화양연화라는 이름의 다홍빛 간판이랍니다.”

그   나이대 여인들은 그런 소품 하나에도 다른 사람에게 어찌 보일까 신경 쓰기 마련이다. 만개한 꽃과 같이 아름다운 시절이라, 남망기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어지간히 그 돈주머니가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니면 다른 말 못 할 속사정이라도 있는 건지 한눈에 의중을 간파하기 쉽지 않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결국은 절로 입을 다물게끔 한다.  

  가게를 나서자 서쪽 하늘에서 까마귀 울음이 들려왔다. 귀에 내리꽂히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탓에 문득 저도 모르게 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까마귀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이 들었다. 날은 맑았고, 칠흑의 새는 새파란 하늘을 가로질렀으며, 속세에 미련 한 점 없던지 그 사람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을 내리깔고 발밑만 물끄러미 보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낡은 주머니를 다시 없을 양 끌어안고서 분주한 거리로 나와, 한 손에 천자소를 든 채 햇살을 등지며 그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어린아이가 있던 곳으로 오던 걸음 그대로 잠잠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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