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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說想-

  위무선이 깊게 잠이 든 모습을 본 적이 언제였더라. 눈앞에 있는 이 사람 생각만 하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법한 나머지, 원하는 기억을 빠르게 집어낼 수가 없었다. 목적은 분명히 ‘위무선이 눈을 감고 있던 적’의 기억이었으나 남망기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와 똑같은 모양새로 눈을 내리감은 채, 겨울 바다의 고요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과거에 젖어들기를 선택했으므로. 위무선과 관련된 기억은 제 가슴을 후벼파든, 아련하게 쓸어내릴 것이든 어느 하나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명확한 기억 하나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이따금 같이 쏟아지는 다른 기억들을 하나씩 느리게 스쳐 지나가야 한다. 일다경부터 촛대 하나가 가련한 모양새로 꺾여 바닥으로 추락할만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붉은 머리끈이 나부끼는 기억들은 하나같이 죄 남망기의 목숨과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해도, 남망기는 검지 손가락을 들어 위무선과의 기억 쪽에 올려둘 테지. 그쪽으로 접시가 찬찬히 기울어지도록. 대관절, 애정의 일이라는 것은 그 길을 다르게 걷는 이가 나오질 않았다.

  맹렬하고 오래가는 불길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몇 번의 풀무질을 곁들여야만 하는 것이 필수불가결이라. 보잘 것 없는 장작의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당연한 일이란 세상의 이치와도 무던히 맞물리는 것이라, 남망기가 위무선을 제 거리 안에 무사히 품게 되기까지도 마찬가지 거센 바람이 몇 차례 일었었다. 얼룩진 과거의 기억은 떠올리기 가시 같기에 꾹꾹 눌러 넣는 찰나였다. 곤히 잠든 위무선의 이마를 쓸어주던 남망기는 힘을 주기도 전, 모진 풍파의 모양새를 한 첨예한 파편 하나에 상념을 찔렀다.

  -고소로 가자.

  겨울보다 지독한 한기를 잡아먹은 비가 내렸고, 위무선은 그 비로 빚어진 사람처럼 위화감도 없이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조각조각 부서져 내려 차마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더랬다. 참혹함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흔적조차 지워지지 아니한 채, 퇴적물같이 쌓여 두꺼운 층을 이루었다. 그 때문에 이 사람이 울어도 우는 줄 모르고 그 안에 파묻혀 새된 비명을 질러도 우스갯소린 줄 알았다. 꽉 말아쥔 주먹의 틈으로 울컥, 손톱에 스몄던 핏방울이 떨어졌을 때 위무선이 고개를 들었다. 구겨진 눈가와, 빗속이라는 하얗고 어두우며 축축한 배경 속에 창백한 귀객鬼客처럼 울었다.

  -나 좀 살려 줘, 남잠. 살려줘…… .

  그리곤 풀어낸 실타래처럼 꼬깃꼬깃하고 가느다란 명줄조차 빚진 사람마냥 말했다. 제 명命은 물론이오, 산 자를 뛰어넘어 죽은 자까지 삼도천을 채 건너기도 전에 붙잡아 발밑의 낙엽처럼 굴리는 사내의 울음은, 세상 딱 한 사람의 가슴을 찢어발겨 틈 사이로 뿌리내렸다. 가슴이 벌어지는 애환마저 끌어안은 남망기는 우산을 내던지고 통증의 원흉마저 품 안에 그러모았다. 꽃마저 지고, 물에 젖어 바스러지는 복숭아나무의 가지처럼, 위무선의 몸이 안으로 무너졌다. 처음으로 거절 없이 손에 넣은 포옹이었다.

  그 직후, 위무선은 약 일주일간 열병을 앓았다. 지독한 열병은 사람을 백치로 만든다거나, 그보다 못해도 기억 어딘가가 뭉텅이로 잘려나간다 했다. 남망기는 그를 정실에 눕혀두었다. 그리고 남희신의 비밀스러운 비호 아래에 7일 동안 창백한 손을 잡고 있었다. 열이 오른 몸뚱이는 금방 불을 붙인 마른 장작 같았고, 그 입술 사이에서 새는 숨은 불똥이 튀는 소리와 닮아있었다. 남망기가 할 수 있는 효과적인 일은 달리 없었다. 그저 비틀어질 것 같은 손목에 영력을 밀어 넣으며, 이 열을 제가 대신 가져갈 수 있길 소망했을 뿐. 비참함 사이를 사경처럼 헤매어 내게 오신 이 사람, 눈만 떠주시어라.

  열이 내리고, 하늘이 정실 디딤돌에 고인 웅덩이를 면경 삼아 고개를 내밀었을 때 위무선이 깨어났다. 열에 시달려 허옇게 탈색한 얼굴은 생기가 없었으나, 분명히 숨을 쉬었다. 부여잡았던 손목의 아래로 맥이 뛰었음을, 남망기는 알고 있었다. 위무선은 다행히 남망기와 남희신의 우려를 깨고 백치가 되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불행 또한 없었다. 그러나 남망기는 위무선에게 이곳에 온 모든 일을 기억하느냐고 구태여 묻지 않았다. 신열이 훑고 지나가 버석하게 마른 입술에 찻잔을 물리는 일이 더욱 간절했기에. 기실, 정인의 온 삶을 쥐어뜯고 두꺼운 근육을 파먹어 피를 마르게 한 과정은 그 누구보다 남망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남망기는 고개를 저어 저를 파고드는 상념의 마른 조각을 애써 털어냈다. 다행히 그것은 끈덕지게 따라붙는 그늘처럼 굴지 않고 양지를 무덤 삼아 조용히 잠들었다. 기껏 마른 이마를 섬세히 거둬내던 수지手指의 끝을 거둬들였다. 삿된 상념으로 그를 대하지 않기로, 무수히 다짐했었다. 쉽게 되리라 믿진 않았으나 맞닥뜨리면 여지없이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 끝맺기를 수차례라. 두 번은 반복하지 않기 위해 괜히 저려오는 손을 제 다른 손바닥으로 주물러놓고, 이번에는 길고 얇은 위무선의 손으로 가지를 뻗었다. 평소라면 자신을 다스리는데 좀 더 넉넉한 시간을 주었을 것이나, 오늘은 조급했다.

  “위영.”

  “으응, 싫어…….”

  “……. ”

  참, 제 정인께선 눈치도 빠르셔라. 이름 한번 불렀을 뿐인데도 무슨 말을 할지 이미 꿰어 계시고. ...헌데, 자고 있는 사람을 부른다면 깨우기 위함밖에 더 있는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남망기는 홀로 머쓱해져 작게 ‘음.’하고 침음했더랬다. 안돼. 자꾸 생각이 다른 쪽으로 새. 위무선만 앞에 두면 산만해지는 정신에, 다소 난감한 낯을 짓곤 남망기는 한 차례 더 위무선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손바닥의 금을 따라 긋고, 굴곡을 따라 미끄러져 벌어진 수지 사이로 자신의 손길을 미끄러뜨리면 완연한 굴레였다. 그리하면, 이 애정에 겨운 사람은 늘 반사적으로 제 손깍지에 스스로 얽혀오시니.

  “일어나야 해.”

  “나는 남씨가 아닌걸…….”

  투정이 한 공기는 섞여든 목소리는 낮게 잠겨있었으나 몹시 맑은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필시 위무선이 장난을 계획할 때나 알아챌 만한 음성이었는데, 숱한 장난을 받아온 남망기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 없었다. 코로 짧고 얕게 숨을 내뱉은 남망기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반대쪽 손으로 그 코를 슬쩍 쥐어 내리눌렀다. 위무선의 입술에서 엄살을 부리는 듯, 아아- 하는 소리가 튀었다. 남망기는 앞으로 이 장난을 일상으로 삼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 나 또 못된 말 했어?”

  남망기의 작은 한숨을 영민하게 알아차린 위무선은 벌떡 일어나 여태 깍지가 끼워져있던 손을 들고 흔들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았으나 묘한 들뜸이 서린 금안 위로 두 명분의 손이 들어찼지만, 눈동자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사내의 눈꼬리에 머물렀다. 맹목적이기도 한 시선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남망기는 쉽게 속상해하지 않으며, 얇은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튕기는 듯한 언성으로 아니. 가볍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빠르게 행동하라는 무언의 당부이기도 했다.

  좀 더 평온한 세상에서 너를 맞이들이게 됐더라면 그 말이 조금쯤 못되게 들릴지도 모르겠어, 위영. 하지만 남망기는 구태여 그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그 평온함이란 어차피 세치의 혀가 베처럼 짜내는 꿈일 뿐이고 현실은 이곳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가장 애끊어지는 이 현실에서 네가 나를 찾았는데 어찌 이 이상을 바라겠어. 남망기는 이 이상의 기쁨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위무선이 일어나기 전부터 진작에 모든 준비를 마친 그였다. 남망기 스스로는 바쁘게 굴 것이 없었다. 다만 눈앞의 정인이 의도적으로 어영부영 늦장 부릴 것은 훤히 알았다. 어차피 당신 손으로 옷을 주워입거나 씻을 거라는 생각은 한 톨도 하지 않았으니 그의 단장도 모조리 제 몫이리라. 그것은 목화 아래에 가볍게 치인 꽃잎이 허공에 잠깐 나풀거리는 것처럼 당연했다. 하지만 이 바쁨은 몹시도 간지럽고 설레었기에 다소 정신없어진다는 핑계로 물리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좋은 목재로 만든 욕조로 위무선을 밀어보내고 병풍의 뒤에 서서 새로 지은 붉은 의복을 꺼내두었다. 그 위로 마찬가지 새로 지은 홍색 끈을 올려두니 사실상 준비할 것은 모두 끝난 탓이라. 하고자 하는 일은 크고 깊었지만 마련해 둘 것의 가짓수는 별로 없었다. 그리 서두른 것치고는 허무하게 끝난 셈 같았으나 남망기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정말로 오래 걸린 것 같다고. 무엇보다, 치르려는 이 일에 가장 없어선 안 됐으며 준비하는 것에 애를 먹은 것은 위무선이었다.

그래, 이 모든 것은 위무선이 있어야만 했다.

  “남잠.”

  따뜻한 물에 폭 잠겨있다 밖으로 나와 물기를 간신히 닦아낸 몸은 부드러웠다. 다소 마르고, 창백해 보이는 피부 위로 둥근 뼈의 외곽이 솟아 두드러졌다. 인두로 지져 다소 색소가 침착한 과거의 상처는 위무선이 조금 더 성장함에 따라 그 부피가 조금 흩어졌다. 앞길에 놓인 행복만 생각한단들, 어찌 그 흔적을 두고 쉽게 미끄러지겠는가. 남망기는 손 대신 쓴 숨으로 상처를 쓰다듬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열기로 이지러진 것이 꽤 괜찮았다. 이렇게 회복되기까지 남망기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제 몸을 내려다본 위무선의 눈에도 상태가 좋다고 생각됐는지 둥근 입매가 벌어졌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왜 불러.”

  “손 좀 그만 떨어. 뭘 그리 긴장하고 그래?”

  옷깃을 빈틈없이 여며주던 남망기의 손길이 멈춰 섰다. 길고 곧은 손가락은 끝에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또한, 그 마디는 굵직했는데 유난히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 때문인가, 위무선은 그 불그스레함이 가볍고 미세한 떨림으로 인해 공중에서 번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옷깃에서 멈춘 손등 위에, 위무선의 손이 가벼운 나비의 날개가 접히듯 내려앉았다. 그 손아귀 안에서 남망기의 수지 끝이 조금 오므라들었다. 문득 남망기는 자신이 참으로 주책없다고 생각했다.

  “의대 제대로 못 매겠어. 몸가짐.”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것을 밑천으로 삼아 촐랑대는 위무선의 허리춤을 겨우 잡아 의대를 바르게 채웠다. 그러나 손의 떨림을 멎어있었다. 손등에 잠시 내려앉았던 나비의 무게가 몹시도 그리워 조금의 시간을 덜어내 할애하고 싶었으나 남망기는 스스로를 달래었다. 앞으로 한 시진만 감내하면 더 이상 슬플 일도, 비탄을 견뎌내며 다 젖은 가슴을 움켜쥐어야 할 사람도 없다고. 지나온 가시밭길은 쳐낼 수 없고 죄인인 것은 변함이 없어 앞으로도 험준하겠으나, 남망기는 위무선에게 샛길 같은 사람으로 살고자 마음먹었다. 그 길을 퍼다 낼 수 없다면, 자신이 몰래 빠져나갈 길이 되어주는 것으로 행복했다.

  위무선이 침상 위에 고르게 퍼져있던 고운 천을 들어 남망기에게 건넸다. 그것 역시 위무선이 걸쳐야 하는 옷가지 중 마지막 남은 하나였는데, 남망기가 저를 어르며 옷을 입혀줬다 해서 끝마무리까지 부탁할 심산으로 내민 것은 아니었다. 그저, 위무선이 해야할 일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붉은색의 반투명한 천이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며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졌다.

  “네 손으로 씌워 줘, 남잠.”

  “위영.”

  “응. 나 여기 있어.”

  위무선은 붉은 면사포를 넘겨받은 남망기의 한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포개듯 감싸잡았다.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손과 손 사이에서, 남망기는 애정에 다다른 열기를 느꼈다. 아.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네가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떻게 잊겠어. 남망기는 빈손으로 위무선의 손등을 덮어 지그시 눌렀다. 면사포는 조금 짓눌려 약간의 주름이 졌으나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불야천에서 지옥을 행하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던 너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괴로워 도망했더랬다. 나는 너를 쫓아가고자 했으나, 쫓지 못했어. 가진 적조차 없었겠지만, 모조리 잃어버린 너를 미련도 없이 쫓아가야 했는데, 나는 가진 것이 많아 그것들의 무게에 짓눌려 따르지 못했었다. 그것은 내 평생의 후회가 될 테지. 하지만 위무선이 조금의 방황을 끝으로 도착한 곳은 남망기였다. 숨겨달라, 살려달라. 부탁하고 칭얼거리는 법을 모르던 이가 다 내버리고 뛰어든 곳이 남망기의 손이었다는 게다. 위무선의 철저한 무너짐을 눈앞에서 지켜본 남망기는 방황을 끝마쳤다.

  아. 역시 사랑하는구나. 내가, 너를.

  앓고 정신을 차린 위무선이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릴 때까지, 남망기는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바깥의 소음을 차단하고 눈을 가렸다. 위무선은 알면서도 그를 놔두었으리라. 막지 않으니 남망기는 기행 아닌 기행을 계속했다. 위무선이 제 침상을 기어올라도 그저 두었고, 밥상에는 고기를 올렸다. 밤늦게 담 위나 지붕에 올라앉아도 그저 두었다. 다만, 떨어질 것을 염려하였을 뿐이지. 그러한 걱정을 소소한 일거리 삼으며, 지붕 위의 위무선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손에는 천자소가 들려있었다.

  어느 날, 위무선은 제게도 잔을 내밀었다. 술도 있고 사람도 둘인데, 잔은 하나밖에 없어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릴 했었지. 목전으로 내밀어 진 술잔은 넓고 얇았다.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액체엔 만월滿月이 나무 우듬지 위로 솟아있었다. 그 어느 날, 제 세상에 불쑥 나타난 누군가처럼. 술은…… .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냥 쓰다는 것만 알았다. 하지만 남망기는 잔을 받아 잠깐만 망설였을 뿐, 손목을 꺾어 그대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남망기는 침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가장 먼저 돌아온 감각은 의아하게도 통각이었는데, 그것은 입술에서 느껴졌다. 손을 들어 더듬어보니 퉁퉁 부어있었다. 조금 스치는 것만 해도 쓰라린 통증과 열감이 올랐다. 그가 잠에서 깬 것을 알아챈 위무선은 그 즉시 남망기를 보더니 똑같이 통통하게 부어오른 입술로 와학, 박장대소하는 것이라. 남잠, 너 대체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졌어? 남망기는 자신이 사고 쳤음을 깨닫곤 온몸의 핏기를 꺼뜨렸다. 쳤다. 정말, 거하게도, 쳐버렸다.

  정좌하고 위무선에게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곁으로 그늘이 졌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하는 말은 남망기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른 채 장난스러웠으나, 말 그대로 죄인은 할 말도 행동도 없으리라. 모가지 위에 머리 대신 천근千斤을 올려둔 기분으로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남망기의 지척에 그가 몰래 품었다가 다 들통 난 정인의 얼굴이 드리워져 있었다.

  확장하는 동공으로 조붓하게 내리감기는 위무선의 속눈썹이 파고들고, 제 숨결에 열기가 스미고. 차가운 단향목은 과육 같은 향에 시간을 내어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한 채로 들이밀렸다. 남망기의 부어오른 입술에 둔통이 내달렸다. 그의 목에 밀착하듯 감기는 양팔을 알아챘을 때, 남망기는 느낄 수 있었다. 별 떠오른 밤을 눈동자를 담아 제게 입 맞춘 위무선을.

  “잊지 않았어.”

  힘주어 말한 남망기는 위무선의 손안에 좀 더 가둬져 있고 싶다는 욕망을 억지로 털어내고 붉은 천을 쥔 제 손을 풀어냈다. 주름을 문지르고 너르게 펼쳐내니 마치 공중에 나부끼는 봄 같아라. 바라는 계절이 조금 느지막하게 찾아왔댄들 어떠랴. 이제 남망기의 손 안에도, 눈앞에도 봄은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 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남망기는 붉은 천을 펄럭여 위무선의 머리 위로 내려 앉혔다. 비로소 갖춰진 위무선은 작약綽約했다. 위무선을 처음 알게 됐을 때 한 번. 그리고 오늘이 두 번째로 맞는 남망기의 봄이었다.

 

* * *

 

  언제나 정실 앞에 마련되어있는 뜰은 이런 날조차 조용하기가 평소와 같았다. 조금 달라진 것이라고는 입을 꾹 닫은 채 정갈하게 차려입은 고소 남씨 수사 한 명과, 합환주만 차려진 상 하나. 그리고 그 상을 등에 업은 고급진 재질의 돗자리 정도였다. 남씨 수사가 인사하며 낮게 함광군, 위 공자. 하고 부르며 고개를 숙인 것으로 두 사람은 툇마루를 내려와 상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섰다.

  단출한 주례가 진행되는 동안, 둘은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떼면 곧 죽을 것 같았고 이 시간이 뚝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어지는 것은 부부라는 신분만이 아니어야 했다. 입술과 숨결을 얽었으니 눈빛마저 단단하게 묶이길 바랐다. 시간이 지나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또 다른 업業을 새긴 몸을 입게 된다 할지라도. 혹은 기나긴 시간을 환생의 고리에 붙들려있단들, 시기가 되었을 때 서로에게 도착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새길 낙인이 절실했다.

  남들은 주례를 줄줄 읊을 때 좀이 쑤셔서 죽을 것 같다던데. 둘이 서로를 눈동자로 파고든 지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다고 여길 무렵, 남씨 수사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얇은 종이가 바스락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둘은 주례가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황당함에 두 눈을 토끼마냥 뜬 위무선은 머리에 쓴 천이 폴랑이는 것도 알지 못하고 물었다.

  “벌써 끝이라고?”

  “이제 맞절하고 합환주를 나누시면 끝입니다.”

  그 말을 받았다간 주례를 몇 시진이나 더 읽게 될지도 모른단 직감에 사로잡힌 남씨 수사는 최대한 솜씨 좋게 말을 돌려 대답하되, 다음 순서가 이어지도록 했다. 이 고소 남씨의 수사는 불야천의 아수라장에서도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이였는데, 그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기 전부터 이릉노조의 악명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왔던 사람이라. 또한 수학 시절부터 남망기를 줄곧 놀리곤 하였던 위무선의 정의로운 성정을 눈으로 직접 보았던 자였다. 그 반짝임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곧잘 그를 만나러 가는 남망기의 잔심부름을 어렵지 않게 도맡아왔었다.

  탁월한 선택으로, 위무선은 시선을 거두어 두 손을 곱게 겹쳐두는 것으로 교배례交拜禮의 준비를 마쳤다. 맞은편엔 붉은 소매에 감싸인 남망기의 얼굴이 보였다. 그에게도 제 얼굴이 보일 터다. 양 얼굴이 서로를 향한 것을 확인했을 때, 두 사람의 무릎이 굽어져 제자리에 하강했다. 수줍게 감긴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고개는, 지니고 있는 애정만큼의 무게가 되어 이삭같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며, 둘은 서로의 이삭을 주워드는 기분이 들었다.

  “합근례合巹禮.”

  합환주가 시선을 받았다. 남씨 수사가 다가와 각자의 앞에 놓여있던 잔을 건네었고, 둘은 그 잔을 서로 바꾸어 들었다. 봄기운으로 달군 술잔이 다섯 손가락 사이에 감기며 제법 묵직한 양을 자랑했다. 필시 술을 좋아하는 자신을 위해 눈앞의 사내가 좀 더 따라두라 일렀을 테지. 위무선은 흔치 않은 기쁨에 깨끗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런 우연이 있나. 나도 남잠을 위해 그의 잔에는 물을 한가득 탄 술... 아니 술을 탄 물을 부어달라고 일러두었는데!

동시에 잔을 비워내고 자성이라도 있는 것 같이 시선이 또다시 서로를 찾았다. 위무선이 바라본 남망기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놀라움이 작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는데, 아마도 잔 안에 담긴 것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위무선은 혼례복의 소매 아래로 조용히 검지를 빼 들어 입술 위에 붙였다. 쉬이. 향긋한 술과 잔에 남아있던 봄이 옮겨 묻은 채 아롱지는 정인의 입술은 남망기에게 너무나도 어지러웠다.

 

* * *

 

  두 사람의 체중을 업고 있던 돗자리는 조금의 흙먼지와 함께 걷혔다. 합환주상合歡酒床도 곱게 접혀 제 할 일 다 했다는 양 떠났다. 물기마저 훔쳐진 술잔은 저를 싣고 왔던 보자기 안에 도로 잠들었다. 조촐한 두 사람의 혼례식일지라도 유일하게 기억해 줄 몇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남망기와 위무선은 그것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것들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설 사람이 있었으니, 이 기쁜 날에 무엇이 섭섭할까. 찾아올 거라 생각지 못했던 기쁨의 방문에 감격하여 울 순 있으나, 설워 흘릴 눈물은 없었다.

  남씨 수사는 소매 안으로 두 손을 갈무리하고, 고개와 허리를 숙였다. 못내 아쉬움이 방울진 것은 당사자가 아닌 그였으나,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이상 설워할 것은 없어라. 세상이 두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이 두 사람은 둘을 받아들일 세상을 따로 만들어 떠나는 것이리라. 그것이 비록 정실이라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 한 채뿐이더라도, 날카롭고 드세 업업業業한 세상의 시선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다시금 신을 벗어 툇마루로 올라선 한 쌍의 연인, 아니, 부부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함광군과 이릉노조의 혼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강행하겠다는 함광군을 뜯어말리다 체력이 다한 고소 남씨 사람들에게, 세상이 아닌 외나무다리로 비쳐드는 빛은 그저 부끄럽기만 한 것이었을 테지. 그 빛이 날아든 어둠의 끝은 깊기만 하고 더 말할 것도 없어 쳐내고자 하여도 쳐내지지 않았다. 그들은 ‘선택하는 것’조차 두 사람에게 과분하다고 말했다. 침묵으로써 두 사람을 뒤흔들어, 각자에게 어울리는 길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다.

  그에 대하여 함광군이 내놓은 대답이 바로 오늘이었다. 남씨 수사는 생각했다. 아마 함광군께서는 어른들에게 혼례를 올리겠다고 고하러 간 것부터 바꿔먹지 않을 마음을 삼킨 채 나아간 것이라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휩쓸리고 자리에 누우며, 노호성을 터뜨릴 때도 그는 담담할 수 있었다. 그 날의 일정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뜨면서 그는 떠올렸다. 기행을 저지르고 천륜에 정釘을 꽂았다며 그 면전에서 욕을 해대는 사람들 속에서도 따스한 눈동자로 녹아있는 함광군의 표정을. 다시 정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운심부지처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봄을 맞이한 사람이었다.

  문득 남씨 수사는 묻고 싶어졌다. 길디긴 옷자락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둥둥 걷어 올린 위무선을 붙들고 선 남망기에게 말이다. 청형군을,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느냐고. 그가 오늘 거머쥔 행복과는 외따로, 굉장히 민감한 질문이 될 것이었다. 부인을 가두고 자신마저 가둔 채 왕래조차 힘들었던 부모의 선택을 자식이 이어받았다. 모두가 무책임하고 가혹하다고 했었는데 그 평판을 이어받아도 괜찮은 것인지.

  위무선은 툇마루 위와 처마의 아래 사이에서 곧고 마른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도처에 운심부지처의 검고 푸르기도 한 기왓장들이 널려 있었다. 저 지붕의 아래에선 이릉노조를 혼자 가라앉기 원통해 함광군을 쥐고 같이 물에 빠져 죽는 악귀라 칭하고 있을 테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평판은 나아지길 바라며 애석한 마음으로 되뇌어도 나빠지기만 할 뿐이다. 또, 이제는 더욱 상관없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그런 것을 따졌던가 싶었다. 원래부터 그런 법은 제 안에 없었으면서도 관념마저 더욱 희미해져 갔다. 없던 것이지만 더욱 놓아도 괜찮았다. 저를 품은 사람은 스스로가 가진 것을 놓으면서 자신마저 괜찮아지도록 얼렀다. 너 술 마시고도 그리 간절하고 애절하게 입맞춰오며 속삭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날아들었을 것을. 그래, 우리 다 내려놓고 이제 둘만 살자.

  위무선의 머리 위에 곱게 얹어진 농홍濃紅한 머릿천이 때맞춰 불어오는 훈풍에 따라 풍경風磬처럼 나부꼈다. 처마 여기저기 둘이 함께 달아놓은 붉은 장식도 너울거리니, 남망기의 눈에는 위무선이 한가득이었다. 가진 것 모두를 이 사람만 얻기 위해 놓아버렸더니 그제야 보였다. 들고 있던 것들은 여태, 여지껏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그것들을 내려놓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절경이었다.

  남망기는 주례를 섰던 수사마저 떠나 정말로 둘밖에 남지 않은 부부의 공간에서 성큼 다가섰다. 망설이지 않은 발걸음이 위무선의 귓가에도 선하여, 뒤돌아섰더니 이제는 남도 아니고 제 부군이셔라. 위무선이 주저할 것도 없이 손을 뻗어 이마에 두른 붉은 말액 사이로 검지 손가락을 비죽 밀어 넣고 파닥였다. 이릉노조의 부군 되시는 함광군은 그 손을 잡아내려 스스로 말액을 풀어다, 쥐고 있던 위무선의 손 약지에 가락지처럼 동여매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손바닥 깊숙이 입술을 파묻고는 얕게 이를 세웠다.

  “어디 봐.”

  “뭘 봤더라? 부군 얼굴이 너무 잘나서 까먹었어.”

  위무선의 허리춤으로 단단하고 굵은 팔뚝이 밀려들어 와 거리를 잡아먹었다. 분명 저를 쳐다보지 않는 것에 심통이 났으렷다. 위무선은 제 불찰임을 기꺼이 시인하며 남망기의 목덜미 부근을 향해 도로록 말려들었다. 도착한 너른 어깨 위로 볼을 기대자 제법 두꺼운 혼례복 위로도 따스함이 물씬 풍겨, 문득 코끝이 시큰댔다. 이 좋은 날에, 왜 이런담. 위무선은 자신이 오늘따라 더 주책없는 것 같았다.

  “위영.”

  “응.”

  “우리 이제 들어가야 해.”

  남망기의 말에 위무선은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위무선이 여태껏 바라보고 있던 풍경은 사람들이 속히들 지칭하는 세상이었다. 자신도, 남망기도 그곳으로부터 나 자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모질기 그지없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 세상에서 남망기와 자신은 각각 군자고 악인이라 어울릴 인연은 아니었다더라. 그래서 둘은 속삭였다. 우리끼리 있을 수 있는 곳에 작은 터전을 똑 떼어놓자고. 아무래도 이 속세는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 그렇지?

  “남잠, 이 작은 세상에서 우리는 부부로 함께 하는 거야.”

  “응.”

  “부군.”

  “부인.”

  위무선의 투명한 입술에서 꺄르르,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정실의 열린 문 안쪽으로 먼저 한 발을 내디뎠다. 제법 넓게 벌어진 문을 중심으로, 두 개의 다른 세상이 있었다. 위무선의 발걸음이 대개 그랬듯, 겁도 없이 다른 곳으로 내딛어졌다. 남망기가 있으니까, 이젠 정말 맘껏 그래도 괜찮았다.

  “들어가서 이거 벗겨주기야.”

  “곧.”

  두 사람은 망설일 것도 없이 문의 저편으로 들어섰다. 둘의 숨결이 몹시도 가깝고 달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닿은 입술과 턱 아래로, 심장이 맞춰졌다. 엇나가는 박동이 닮고 닮아 한 사람처럼 뛰었다. 엉겨 붙는 혼례복의 긴 자락만큼이나 이 순간을 너무 오래 기다린 것만 같았다. 남망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위무선도 더는 물러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사이에 그어져 벽도 없으면서 넘어서지 못하던 선은 두 쌍의 발에 의해 경계가 허물어지고 과거의 일로 물러섰다.

  무책임하게 보일지 몰라도 밖은 좋을 대로 굴러가게 두자며 두 사람은 속삭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맹목적이 될 준비가 끝난 둘은 발목에 달려있던 족쇄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그 자리가 간지러워 괜스레 웃어 보였다. 그러나 둘의 손은 각자의 부군과 부인을 동여매고 있어 그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떨어지면 그것이 곧 죽음일 것 같아 애가 달았다. 구순 사이에 틈이 보이기 무섭게, 다시 맞물렸다.

  남망기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헛돌았다. 이윽고 그 손끝에 정실의 문 손잡이가 정확히 걸리자, 다소 거친 손길로 닫혔다. 완전히 닫히기 전, 두 사람의 사이로 붉은 천이 탐스러운 과실果實처럼 떨어져 내렸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문이 마침내 굳게 잠겨 들었다.

  세상世上에서 벗어나, 비로소 세상說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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