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poiler_various


아르사기다.
계절이 두 번째 허물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나려 아정한 선체仙體를 움직였다. 고아한 자태로 중턱에 서서, 새를 불러 소맷자락과 옷깃을 물게 하고는 가장 높은 곳 너머로 유유히 걸어갔다. 형체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얇은 옷은 뒤이어 명을 다하려다 망설임을 잡은 작은 미련에 흩어지는 조각을 붙들고 마지막 하늘을 담으려 했다. 간절한 바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망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팔랑팔랑 불어온 서책의 낱장이 작디작은 몸을 실어 돌아다니는 바람에 여기저기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온전한 청청靑靑을 담지 못하게 된 조각은 무슨 짓이냐며 불평했지만 종잇장은 달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낯선 감촉에 신경을 곤두세운 산수가 서로를 보며 수군대는 것 같더니 곧 붓을 들고 창천을 유영하는 종이를 낚아챘다. 특별한 일이 없고서야 늘 같은 이야기로 가득 찼던 산이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만들려 하는지, 몸에 닿은 것을 받아들여 삭막에 덮여있던 작은 경개景槪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산의 아이들이 여느 때처럼 맴도는 시간을 가져다 흘러가는 시냇물에 적시려는 찰나, 손님이 찾아와 산의 흙을 밟았다. 걸어놓은 종도 없으니 들리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도 짧은 호선을 그린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해 발길이 끊겨갈 무렵 인영이 현인산의 입구에 다다랐다. 그림자를 등지고 미색을 풍기는 사람은 둘로 한 명은 희고 한 명은 검으나 그 외모는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여, 세속을 벗어난 선인이 현신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높게 동여맨 머리칼은 폭포수와 같아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고 짙은 윤기 어린 비류飛流가 붉은 비단과 함께 찰랑였다. 일부만 말아 올려 관을 끼우고 자유롭게 풀어 내린 머리칼은 뒷머리로 길게 내린 하얀 비단 아래로 살며시 흔들렸다.
서로를 한 번씩 본 훤칠한 인물들이 산의 굴곡을 타고 흐르는 석음夕陰 사이로 차차 모습을 감추어갔다.
하얀 이가 먼저 산을 올랐다. 멋대로 난 풀들이 거칠고 성하여 걸음을 디딜 때마다 쉬익, 하는 소리가 났다. 식물에서 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할 만큼 의례적인 소리는 무수히 엇갈리다 한 가락을 만들어냈다. 몇 번이고 원점으로 돌아가 가락을 주奏하더니 점점 멀어져가서는 이내 마침표를 찍었다. 같은 땅에 발 딛고 선 것 확실하나 오르는 길이 각기 달라 둘 사이의 거리가 먼 것을 감안하고도, 발밑의 소리도 잠잠해지니 항상 옆에서 말거는 이 없는 하얀 이의 주위는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북쪽에서 놀러 온 얕은 바람이 다가와 여린 살갗을 훑고 요대에 묶은 패옥의 푸른 술을 건드렸다. 술이 한 올 한 올 살랑이는데 시선 밑의 일을 모르는 눈은 햇빛을 향해 자라나는 해바라기처럼 올곧다. 미동한 외관은 어느 도공의 역작인 듯하였으나 결국은 사람인지라 도桃색 유약을 바른 듯 하얀 얼굴에 발그레하게 생기가 올라 있다. 미려한 살빛에 유독 붉은 이륜耳輪만이 검은 휘장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저 뒤편에 남겨져 있던 검은 이가 흐트러지게 선 자세를 바로잡고 느긋하게 뒤를 따랐다. 잘 만들어진 연극의 이야기처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어긋나는 부분 하나 없이 유려하게 이어지는 손놀림을 따라 흑색 피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끝에 달린 붉은 술이 무녀의 손끝에서 흩날리는 가벼운 천 자락을 연상케 하여 마치 무용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들게 했다. 가벼이 뒷짐 지고 내딛는 것이 어디 마실이라도 나온 모양새라 산수와 영장靈場을 갈라내는 좁은 틈에 낀 이질감이 애꿎은 나뭇잎만 툭툭 쳤다. 하늘에 닿을 듯 솟아난 나무에서 서서히 내려앉은 갈빛 흔적이 쌓이고 쌓여 땅에 사는 벗들과 섞여들었다. 마른 흙이 신에 채며 함께 살짝 떠올랐다 힘없이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한데 모였다가 다시 퍼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그들이 보고 들었던 것들을 빈 종이에 써 내린 후 훗날의 아이들을 위해 다시 한 장 한 장 모아 엮어 서책을 만들었다. 두 걸음 딛고 다섯 걸음 디디며 가지 위에서 율동하는 나뭇잎처럼 하늘거렸다. 간드러진 음색이 또 다른 장난을 칠 대상을 찾아 내려온 바람에 붙잡혀 남쪽으로 떠나갔다.
일다경이 지났을까, 어느덧 산의 공기가 분위기를 달리했다. 널찍한 소매 밑으로 드러난 손가락에 감겨오던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따뜻하게 출렁이는 경계에 젖어 수분을 머금은 서늘함이 전해졌다. 이쯤이면 되었겠지. 그리 생각한 하얀 이는 두리번거리며 쉬었다 가기에 알맞은 나무를 찾았다. 서 있는 곳의 맞은편에 굵고 단단한 나무줄기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눈동자에 담겼다. 언젠가 보았던 것과 비슷한 형상에 그것으로 정하고 가볍게 올라 걸터앉았다. 줄기에 등을 기대어 편케 한 후 손목에 감아두었던 하얀 천을 풀어내 눈에 감았다. 천 아래 숨은 눈을 가늘게 뜨니 스며든 노을에 희미한 눈앞이 등빛으로 물드는 것 같다. 정작 물들어야 할 단풍은 때가 되지 않아 아직 푸르른 녹을 띠는데, 작금의 노을은 가을인 것처럼 굴어 전에 없이 그 빛이 짙다고 생각했다.
밑동에 기대어 놓았던 고금을 들어 무릎에 앉히고 일곱 현을 누르고 뜯었다. 보이지 않아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손길이 섬세했다. 유려한 손가락이 텅 빈 오선지에 휴부休符를 그리고 튕겨지는 현에서 가느다란 음부音符의 춤사위가 퍼져나갔다. 울림이 멎고 얼마 가지 않아 잔잔한 숲에 파도가 일었다. 그리움을 몰고 가까워질수록 그 높이를 더하다 한 번에 덮쳐들었다. 마른 땅이 적셔지자 느슨해진 벽을 뚫고 갇혀있던 추억들이 솟아나는 듯했다. 애절한 음이 겹치고 반결盤結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오선에 그 위치를 잡아갔다. 저마다 각양각색의 모양이 새겨져 완성된 곡보는 그가 지은 유일한 곡인 <忘羨> 이었다. 마지막 마디가 저물어가는 지평선을 건너며 자디잘게 남아있던 여운마저 가져가 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미세하게 떨리는 현을 눌러 울림을 멈추니 청백색의 잔음이 주위를 둘러싼 발에 막혀 무대 뒤로 퇴장했다. 덩그러니 놓인 무명천이 권운무늬 은각을 잘 덮어 그 모양을 숨기었다. 본래 있던 곳의 뒤쪽으로 기대어 넘어지지 않도록 한 가지에 앉은 하얀 달이 이른 고개를 들 무렵, 부러진 나뭇가지와 마른 잎들이 한데 엉켜 바스라지는 소리가 났다.
성정을 표현하듯 경쾌하게 부서지던 발걸음이 풍정낭식風定浪息했다. 달이 앉고 해가 선, 반장쯤 남은 거리에서였다. 곧 다시 천천히 발을 뗀 인영이 적당히 숨긴 인기척으로 차분하고도 빠르게 기대앉은 이의 앞에 섰다.
널따란 소매를 코끝에 가져다 대니 전단栴檀향이 피어나 은은히 후각을 간질인다. 그이 바라던 대로 고개가 돌려지자 감돌던 잔향이 기다렸다는 듯 맞춰오는 입술에 부드럽게 넘어갔다. 길게 붙였다가, 짧게 붙였다가, 낯간지러운 소리를 흘리며 여러 번 맞붙여 마음껏 맛보고는 한입에 머금어 빨았다. 단아한 손에 힘이 들어가 얇은 피부 위로 핏줄이 도드라진다. 나만 봐야지. 무릎 위에 얹은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석류를 개어낸 것을 붓에 적셔 바른 것처럼 탐스러운 붉은색을 독차지하려, 그리 말하는 눈빛이 온려했다.
새하얀 자기에 두 번째 유약이 덧그려진다. 그 하는 양 내버려두려 힘을 빼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 꽃봉을 맺은 불꽃이 당장이라도 저 가는 몸을 품고 마음껏 취하라 유혹해 딱 죽을 것만 같았다. 보란 듯이 기세를 더하는 불에 그을음을 양분 삼아 자랄 꽃을 염려하여 애써 억정했다. 우기누른 잔재가 두 손을 가득 채웠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한참을 괴롭혀 불거진 구문口吻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열어달라는 의미는 맞으나 재촉한 것은 아닌데 금방 열리는 입이 조심스럽다. 순순한 모습에 만족스레 웃어 보이곤 길을 잃었던 혀를 밀어 넣어 동洞의 어드메, 숨겨진 보물을 찾아 축축한 살덩이를 움직였다. 입천장을 살살 긁던 이는 접문을 하면서 마치 턱을 긁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눈꼬리를 접으며 잇새로 도망치려는 웃음을 대신했다. 검지는 혀가 되고 턱은 입천장이 되는 건가? 괜스레 뻐근해진 손을 살짝 떼었다 다시 나무줄기를 잡아 지탱했다. 목 언저리에 두었던 남은 손으로 연푸른 옷깃을 파고들어 쇄골께를 어루만지면서 치열을 훑고 점막을 핥았다. 안쪽에서 찾아낸 보물을 기쁘게 얽고 감아올리며 내키는 대로 희롱하니 고운 미간이 좁혀진다. 목덜미를 배회하던 손을 들어 선이 진 부분을 눌러 펴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도 한 번 쓸어냈다.
기나긴 접문에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을 따라 흘러 흔적을 남기었다. 가늘게 늘어지던 은사는 언제 끊겼는지 사라져 있었다. 입을 먼저 맞댄 건 분명 저인데 힘에 부치는 것이 억울해, 흐트러짐 없이 단아한 정인을 은근히 째려보며 밭은 숨을 뱉었다.
"남잠, 어찌 반항 한 번을 안 해."
"너도 안했잖아."
"나는 못한 거,―"
지. 위무선은 그대로 문장의 끝을 맺지 못한 채 잔열이 올라 붉어진 눈가와 잡아먹을 듯 강렬한 빛을 품어 형형한 시선을 마주했다. 하얀 띠의 매듭을 풀어낸 눈에 작은 불씨가 강하게 남아있어, 또 어디에서 달아오른 걸까. 아련을 자아내는 여휘餘輝에 오롯이 찬 제 모습에 가슴 한편이 간지럽다.
"남잠…."
내가 먼저 시작해도, 그가 먼저 시작해도 결국 무언가라도 당했다는 양 구는 사람은 왜 항상 남이오라버니인건데. 역시 억울함은 착각이 아니었다고 퉁명스럽게 삐죽였다. 나는 아무 잘못 없어. 하면서 잘도 이륜을 물들이며 안아와 정신 차리고 보면 그 품에 안겨있는 채라. 제 말 한마디면 간이고 쓸개고 빼주겠다 하면서 야래夜來만은 꽉 끌어안고 내어주려 하지 않는 게 어리로워, 위무선은 또 한 번 지는 수밖에 없었다.
"나 어땠어?"
"좋았어."
"잘 배웠지!"
성황리에 치러진 고백 이후 처음 접했던 풀숲의 이슬을 아르사기고 꼭 다시 해보리라 다짐했던 게 엊그제만 같은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보褓를 풀어낼 기회가 주어졌다. '상황을 재연하는 놀이'라며 이름 붙이고 이날만을 고대하던 위무선은 만족스러운 결과에 뿌듯해진 얼굴로 말했다.
신이 난 위무선과 대비되게 그늘진 낯을 한 남망기는, 숨을 폭 내쉬고 눈꼬리를 접었다가 휘며 환한 초승달을 그려내고 동시에 좋은 모양으로 부어오른 입술을 훔쳐 뽀얗게 앉은 미소를 앗아갔다. 단숨의 열기로 발그레해진 눈가에 열꽃을 찍어내며 위무선의 뒷목을 잡아내려 이마를 맞대었다.
"위영, 그때 하지 못했던 건 하나가 더 있어."
번들거리는 입이 담담하게 움직였다. 입 모양은 흔들림이 없으나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남망기는 드러난 귓가에 욕망을 심고 언제나처럼 아정한 선문의 명사, 함광군의 탈을 썼다. 무방비한 사내를 슥 훑어보고는 제 앞에 나란히 놓인 팔 하나를 잡아끌어 몸 위로 겹쳐 안았다. 손 짓 한 번에 덜렁 끌려온 위무선은 등에서 만난 손이 홧홧하여 익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멀어지려는 순간 눈길이 허공에서 엉키었다.
"어?"
위무선이 의아함을 머리 위에 걸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나도 빠짐없이 다했다고. 눈을 가리고, 입을 맞추고, 혀를 섞고……. 그 심지에 기름을 부은 순간 얌전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여러 예상의 가지에 돋아났던 일이라 그렇다 치지만 그가 하는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그 당시에도 이외에 다른 일은 없었다. 그런데 무엇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혹시 또 제가 무언가 잊은 건 아닌지 기억을 되짚어 봐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가만히 두 눈 가득 성신星辰을 채우고 남망기를 응시했다. 이러면 그가 말을 해주겠거니 하며. 그러나 그는 궁금증을 보고도 모른 체했다. 물음표가 떠오른 동공은 누가 봐도 알아챌 정도로 선명했으나 의중을 알아주려 하지 않아, 위무선은 조금 삐지려는 마음이 만만이었다. 입을 열려는 기색이 보이자 곧바로 먹혀들어 조금도 벌려지지 못한 덕분에 더 심통이 났지만 말이다.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떨어지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잘근잘근 씹다가 꼭 닫힌 치아를 밀어내 보호되고 있는 살들을 취하려, 사탕을 굴리듯 깨물고 빨다가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잔소리는 산에서 내려가면서 달게 들을 테니, 묻지 말라는 듯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혀로 톡톡 건드리니 순순히 열린 구문이 한 걸음 물러났다. 기꺼이 초대에 응한 혀가 도톰한 살덩이를 얽었다. 길게 내어 빈틈없이 휘감고 풀기를 여러 번, 혀뿌리부터 위로 죽 긁어 올리는 혀놀림에 습해진 입안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여린 점막을 녹이려는 양 현란하여, 막혀오는 숨에 등을 쳐도 입맞춤은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는 폈던 손을 주먹 쥐어 힘을 실어 쳤는데, 그래도 멈춰주지 않았다. 위무선의 노력이 무색하게 반응 하나 않던 혀는 혓바닥 깊은 곳을 눌러 가득 찬 타액을 삼키게 하고서야 천천히 떨어졌다. 불만족한 목울대가 울렁이려다 잠잠해진다. 이려는 물결을 가다듬는 소리가 났다.
어깨에 이마를 대고 차오른 숨을 고르던 위무선의 두 손목을 한 손에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 검은 소매 안의 부적을 꺼내어 감았다. 남망기는 결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한 두 팔을 들어 제 목에 걸치게 했다. 어느 날의 객잔에서처럼, 술래잡기는 시작도 않았는데 끝이 났다. 제가 그려낸 이야기와 다르게 흘러가자 당황한 위무선은 눈만 도록 굴리며 그 하려는 것이 무어인지 보려했다. 시선 느껴지는 것 분명할 것인데 남망기는, 그저 심연을 머금어 한층 더 깊어진 금색으로 마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는 빌려줄 수 있어."
말액에 관련된 부탁을 몇 번이고 거절하며 들어주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남망기는, 백봉산에서의 일을 만회하려 단정히 매여있던 말액을 끌러 그의 눈 위로 둘러주었다. 회색과 자색이 섞인 눈동자가 구름무늬의 띠에 의해 가려진다. 어두워지는 시야에 위무선은 오늘은 밤이 길겠구나싶어 조금 슬퍼했다. 누가 그에게 고아하고 아정하다 하였는지. 입안이 달아도 너무 달았다. 당호로가 있었다면 금세 산사나무 열매가 갈라져 새콤한 맛이 가득 퍼졌을 터였다.
남망기가 소매 안에 넣어두었던 꽃을 꺼내 머리카락의 동여맨 쪽 윗부분에 비스듬하게 꽂았다. 백색 꽃이 노을의 끝물을 받아 찰랑이는 끈 같은 색을 띠었다. 엄지손가락이 눈두덩에서 배회하다 눈꼬리에 진 곡선을 따라 수차례 덧그렸다. 그대로 손을 옮겨 귓불을 만지작거리다 턱의 모양을 그리며 천천히 내려와 볼을 쓰다듬었다. 말간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떼니 두두룩하게 솟은 들판 위에 도색 꽃이 한 송이 피어나 새침하게 웃는다. 서늘한 두 개의 전단향이 뒤엉켜 그 향기가 더욱 깊어져 갔다.
밤을 두른 달보다 낮을 두른 해가 가진 시간이 많은 때, 어쩐지 오늘은 달의 것이 더 많을 듯 했다. 떨어질 것만 같던 입술이 다시 닿는 순간 조금씩 쌓이던 황혼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붙잡았다. 샘물에 인 윤슬이 오래도록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