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jwx1031


짝사랑과 입맞춤은 아무도 모르게
“내가 오늘 뭘 가져왔게? 짠~ 이거 봐라.”
위무선의 말에 고개를 돌린 강징은 하얀 쿠션과 안대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잘 생각이냐? 그냥 학교를 오지 마.”
“질투 나? 하긴 넌 선물 받아본 적 없었지? 아하하!”
위무선의 말에 강징은 분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올해 들어 위무선의 책상과 사물함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선물이 종종 도착했다. 대부분 간식거리였지만 얼마 전 받은 쿠션과 안대는 깔끔하게 포장되어 리본까지 묶여있었다. 선물을 받고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는 위무선을 옆에서 지켜보던 강징은 도대체 누가 저런 놈에게 코가 꿰였는지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움을 느꼈다. 물론 죽어도 인정하지는 않을 생각이었지만.
“닥쳐라. 헛소리 말고.”
“아~ 어떤 수줍은 친구가 주고 간 걸까. 궁금하다, 궁금해~ 나 좋아하는 사람이겠지? 오, 그럼 이제부터 썸 타는 건가? 야, 강징. 무시하지 말고, 누구일지 빨리 너도 생각해봐.”
지겹다는 듯 강징이 이어폰을 끼고 필사적으로 모른 체하자 위무선은 고개를 돌려 마침 사물함을 열고 있는 남망기에게 말했다.
“남잠! 선물 안 받았어? 너도 여자애한테 인기 많은 거 같던데. 나는 선물 또 받았다! 어떤 수줍은 여학생이 날 엄청 좋아하나 봐.”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살폈지만, 동요하는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하면 나타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굉장히 부끄럼을 잘 타는 학생인가보다. 위무선의 말에 남망기는 교과서를 꺼내며 헛소리.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위무선은 가방을 열더니 안대와 베개를 꺼냈다. 강징과 친구들에게 대충 손 인사를 하곤 바로 잠을 청했다. 처음 선물을 받았을 때부터 베개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잠에 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렴풋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도 소리에 잠이 깰 위무선이 아니었으나 불행히도 잠시 후 와르르! 무언가 쏟아졌다. 아마 누군가의 필통이 쏟아진 것 같았다. 잠을 방해받은 위무선은 불청객에게 항의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방향을 항해 입을 열었다.
“사람 잠을 깨우면 어떡해.”
툭!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랐는지 주워 담던 펜이 떨어졌다. 위무선은 잠기운이 듬뿍 서린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너… 내가 참아보려고 했는데 너무 시끄러웠어. 잘 자는 사람을 깨우고 말이야. 너무한 거 아냐? 책임져.”
말을 하는 동안 발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코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느껴져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뭐? 할 말 있어? 설마 눈 가렸다고 몰래…”
때리고 도망가는 거 아니지? 하는 위무선의 뒷말은 말 그대로 입술에 먹혔다.
입술에 와 닿은 말랑한 것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더 뜨거운 무엇인가가 위무선의 입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밀쳐내려고 하자 양 손목이 붙잡혔다. 한 손으로는 제 양 손목을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머리를 단단히 고정했다. 그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져 위무선은 섣불리 밀어내기엔 미안하다는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입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 낯설고 자극적이라 제 마음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실컷 입안을 헤집은 혀가 빠져나가고 아랫입술이 깨물렸다. 손목을 잡은 손이 풀리는 느낌에 정신이 들어 황급히 안대를 벗자 밝은 빛에 눈앞이 흐렸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18년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와 키스를 했다. 그런데 상대의 얼굴도 모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자신에게 이렇게 강렬한 키스를 선사할만한 여학생은 떠오르지 않았다. 영영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같이 하교하던 강징의 한 마디 덕분에 위무선은 단서를 찾았다.
“아, 아까 점심시간에 무슨 일 있었냐? 남망기가 화나 보이던데. 너네 또 싸웠냐?”
“점심시간에 별일 없었는데? 그리고 나랑 남망기가 왜 싸워.”
“너네 어렸을 때 된통 싸워서 난리 난 적 있었잖아.”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동창인 남망기와 좋지 않게 헤어졌었다. 반장인 위무선과 부반장이던 남망기는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졸업 직전에 크게 싸우고 난 후 학교가 갈라져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랬던 것 치고 올해에는 사이가 꽤 나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물론 싸웠다는 사실조차 방금 기억해냈지만.
“어떻게 그걸 까먹었지?”
“뭐 때문에 싸웠냐. 너네? 남망기가 그러는 거 처음 봤는데.”
“아니, 그게… 기억 안 나.”
오늘 점심시간에 남망기가 교실에 왔었던 거 같으니 한 번 물어봐야 했다. 갑자기 떠오른 옛 생각에 연락하기 조금 껄끄러웠지만, 제 첫 키스를 가져간 도둑을 잡을 단서가 생겼는데 멍하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을 먹고 바로 남망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남잠! 내일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수업 끝나고 잠깐 남아주라!]
[알겠어.]
붓기가 가라앉은 입술을 매만지며 위무선은 미소 지었다. 내일이면 이 키스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다!
방과 후 반장 일을 마친 남망기가 교실에 돌아오자 위무선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무슨 일인데.”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위무선은 자신의 추리를 칭찬했다. 아마 점심을 일찍 먹은 이 불쌍한 반장은 교실에 들어오려다 저의 첫 키스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당하는 본인도 아찔했으니 보고 있는 사람도 적잖이 놀랐겠지. 예전에 남망기에게 책을 보여줬다가 찢긴 전적이 있는 위무선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추리였다. 책으로도 못 보는데 실제로 봐버렸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제 점심시간에…”
그 말에 남망기가 크게 숨을 들이켠다.
‘하이고, 남잠. 이렇게 순진해서 어디 입이나 맞춰보겠어!’
제 추리에 확신이 서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교실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거든. 내가 아주 좋은 경험을 했지. 근데 상대방을 못 봤단 말이야? 그래서 찾고 있었는데, 강징 말로는 어제 네가 점심시간에 일찍 교실에 왔었다면서?”
“강만음이 날 안 본 줄 알았는데.”
“너 제대로 들켰어! 깜짝 놀랐지. 어?”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남망기는 그제야 눈을 마주치며 위무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아니! 그러니까 남잠! 솔직히 말해.”
“응.”
“어제 점심시간에 나랑 키스한 사람 누군지 봤지? 누구야?”
“뭐라고?”
남망기의 눈동자가 드물게도 티 나게 흔들렸다. 위무선은 드디어 말을 꺼냈다는 후련함과 대답을 들을 기대감에 남망기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 미처 보지 못했지만.
“난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어.”
“내가? 설마! 그렇게 키스 잘하고, 대범하고, 힘이 센 여학생을 어떻게 알아.”
“넌 내가 뭘 했다고 생각해?”
“교실에 왔다가 내가 어떤 여학생이랑 키스하는 걸 봤겠지! 좀 억울한데 나한텐 그게 첫 키스거든? 어제 모르는 사람이 내 첫 키스를 뺏어갔어! 너도 봤겠지만 내가 시작한 게 아니야! 눈 좀 가린 틈을 타서 누가 입술을 뺏어갔어. 이게 말이 돼?”
위무선은 열심히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남망기는 제대로 듣고 있는지 의심되는 멍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잠시 후 남망기는 조금 주저하는 얼굴로 답지 않게 더듬거렸다.
“아까… 아까 좋았다면서.”
“처음이어도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는 해보면 딱 알지! 정말 장난 아니었거든."
“너 정말… 누군지 궁금해?”
“응!”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남망기의 귀는 이제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아하하하하! 남잠아, 남잠. 키스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 하긴 너같이 목석같은 애가 먼저 키스하진 않을 거고, 남들은 네가 무서워서 입을 못 맞출 테니 너는 평생 키스 못 하겠네! 남잠, 너 뽀뽀랑 키스의 차이는 알아? 절대 모를걸!”
누군가와 입을 맞출 남망기를 생각하려 애썼으나 절대 그려지지 않았다. 여자와 입을 맞추는 남잠이라니!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었다.
“모른다고.”
“그야 당연하지! 너 내가 보여준 책 찢어버린 거 기억 안 나? 그런 거 한 번도 안 봤지?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아마 어제 나 보고 처음 알았을 텐데 이를 어째.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남씨 둘째한테는 너무 큰 자극이었겠네!”
“누가 모른대.”
핏발이 서렸는지 귀뿐만 아니라 남망기의 눈도 약간 붉어졌다.
분명 그만두라는 신호였지만 남망기를 놀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위무선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응? 알았던 거야? 그것도 놀랄 일인데! 너희 형님이 아시면 기절하시겠다.”
“안 믿겨?”
“말도 안 돼! 진짜 못 믿겠는데.”
“그럼, 확인해봐.”
어? 그 말을 마친 남망기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에 닿아오는 온기에 위무선은 멍하니 몸을 맡겼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입술에 정신이 돌아왔다. 방금 깨물린 아랫입술과 숨결이 맞닿았을 때 느껴진 시원한 향기는 분명, 어제와 같았다. 놀라운 발견에 위무선은 상상도 못 했던 범인을 지목했다.
“남잠. 어제…… 너였어?”
“... 응.”
눈을 내리깔아 속눈썹 그늘을 드리운 채 남망기가 수줍게 대답했다. 방금 입을 맞춰 입술은 평소보다 훨씬 붉었다. 아까부터 붉게 물들어 시선을 잡아끌던 귀에 이어 양 뺨도 티가 거의 나지 않는 옅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토록 찾던 범인이 이렇게나 미인일 줄이야. 위무선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목구멍에 걸려있던 의문을 토해냈다.
“나 좋아해?”
그 질문에 남망기는 고개를 들어 위무선과 눈을 마주했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살짝 일렁인다. 조금 전까지 입을 맞췄으면서 얼굴을 마주 보니 새삼스럽게 요란해진 심장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방금 질문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위무선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렸을 때부터.”
“혹시 우리 싸웠을 때랑 관련 있어?”
“응.”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아 위무선은 쉬운 길을 택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스스로 생각해."
“네 머리카락이라도 잘랐어? 아니면 그 반지… 말액이었나? 그걸 뺏어갔었어?”
“ ...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남망기는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이제 이 반지를 마음대로 해도 돼. 네가 원한다면.”
반지를 건드리기만 해도 질색하던 남망기가 맞는지 의심되는 발언에 위무선은 새삼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키스할 남망기도 아니었지만,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위무선 자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너 정말… 진짜 나 좋아해, 남잠?”
“응. 널 좋아해. 위영”
남망기가 진심을 담아 고백했다. 그 하얗고 매끄러운 뺨에 위무선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티도 안 냈으면서 어젠 왜 그런 거야? 눈 가린 사람한테 몰래 하는 게 취향이야?”
“그 안대, 여학생이 아니라 내가 준 거야. 다른 선물들도.”
남망기의 말에 위무선은 또 깜짝 놀랐다. 그럼 지금까지 받았던 그 선물들이 전부? 매번 자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을 남망기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귀여우면서 사랑스럽기도 하고, 아주 대단하네. 망기 형!
“널 정말 좋아해. 나랑 썸 타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남망기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생전 처음 보는 남망기의 미소에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절세미인을 한껏 눈에 담자, 순간, 입을 맞출 때처럼 온몸이 짜릿했다. 남잠이, 나를, 좋아한대! 문득 시선이 입술로 향했다. 평소에는 잘 열리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입술 속에 그렇게 뜨거운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니 다시 맛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키스를 잘하는데 썸은 무슨! 나도 널 좋아해, 남잠. 입 맞춰줘. 그러면 이제부터 사귀는 거야. 오늘부터 1일인 걸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이 맞닿았다. 입천장과 치열을 고르게 훑는 혀에 다리가 풀릴 것 같아 남망기의 목에 손을 둘렀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좋아했으면 얘도 어제가 첫 키스인 거 아냐? 그런데 왜 이렇게 잘해? 입맞춤이 끝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키스가 끝나고 떨리는 손으로 제게 반지를 끼워주며 말액의 뜻을 설명해주는 남망기 때문이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다가 반지에 짧게 입을 맞춘 남망기는 아까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그래봤자 다른 사람으로 치자면 미소에 가까웠지만 밝게 웃는 그 얼굴에 위무선은 또다시 홀린 듯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