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사이시 조- 첫사랑


설화
@Snowice_rab

보름달의 신기루
“꺼져!”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때리며 복마동 안에 울려 퍼졌다. 어둡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동굴 안을 맴돌았다. 정신이 혼미한 채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의 옆에는 말끔하고 옥 같은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부상을 당해 피투성이에 흙이 묻어 엉망이 된 옷, 흐트러진 모습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영력을 넣어주던 남망기가 있었다. 이릉노조는 분명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온기가 없고 창백해 죽은 사람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차갑게 느껴졌다. 유일하게 영력을 넣어주면서 피부가 맞닿은 부분만이 체온이 전해져 따뜻하게 느껴졌다.
“위영, 고소로 돌아가자.”
남망기는 영력을 넣어주면서 몇 번을 거절당하고도 끈질기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놓아버린 그에게 이런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위무선은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미 그럴만한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힘을 덜 들이고 움직일 수 있는 입으로 강하게 말해 남망기를 밀쳐냈다.
“돌려 말하니까 이해를 못 했나 보지? 세가의 높으신 명수사 함광군께서 사도를 걷는 자의 말은 말이 아니라 못 알아들으셨나? 그럼 똑바로 말해줄게. 잘 들어. 고소 남씨도 운심부지처도 싫어. 그러니 얼른 꺼져.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어떤 일에도 변함없이 담담하던 남망기의 표정이 일순간 흔들렸다. 얼굴에는 슬픈 빛이 떠올랐고 내리깐 가늘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남망기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
함광군이 이릉노조를 찾아다닌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였다. 함광군의 명성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사악한 것을 곁에 두고 사도를 수련하는 이릉노조를 극도로 싫어한다고 생각했고 고소 가문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이릉노조를 적대해 그와 결판을 내기 위해 찾아다니는 것이라 생각했다.
남망기는 금릉의 만월례에 이릉노조가 참가한다는 소식 직후 곧바로 그의 아버지 금자헌이 이릉노조의 휘하에 있는 귀장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나서서 요 며칠 계속 그를 찾고 있었다.
이릉노조에 대한 소문이 돌아다니면 그곳이 어디든 남망기는 반드시 찾아갔다. 들리는 얘기를 쫓고 쫓아 도착한 거리에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혹은 가끔씩 진짜 그의 모습을 봤다는 사람들을 만나 실마리를 찾기도 했지만 대부분 허사인 경우가 많았다.
남망기가 이릉노조의 화제로 떠들썩하게 얘기하고 있는 한 무리에게 다가가자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모두 떠들던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한 사람이 먼저 나서 최대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아이고, 이거 자태를 보니 귀한 공자님 아니십니까. 저희 같은 일반 서민들에게 어쩐 일로 오셨는지…….”
남망기는 담담하게 이릉노조의 행방을 물어봤다. 무리는 척 봐도 품위가 넘치고 신선처럼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질문을 하니 당황했지만 방금 전 가장 열심히 얘기를 하던 옆 사람이 대신 나서서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글쎄요……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거리에 돌아다니는 소문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었을 뿐이라서요. 이릉노조라는 자가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남망기가 풍기는 분위기에 위축이 들어 몸을 숙이고 열심히 존칭을 사용해 얘기했다. 무리의 가장 구석에 있던 소심해 보이는 사람은 일행의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남망기는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호탕하게 대화하는 무리들을 발견했다.
“……저기…… 저 사람들이라면 알지도 몰라요. 방금 전에 저희에게 정확한 정보라고 신나서 얘기해 주던 사람들이거든요.”
“호의 감사합니다.”
남망기는 일행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한 뒤 발견한 무리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러나 어떤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거리에 흔히 나도는 소문일 뿐이고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을 거라며 혀를 내두르고 지나갔다. 함광군을 아는 자들은 그의 눈치를 살펴 아는 걸 최대한 얘기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남망기는 구석진 장소도 빼먹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신빙성 있는 정보를 듣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 물건을 싣고 지나가는 마차가 지나갔고 남망기는 거리의 끝으로 이동해 걸었다. 마차가 다 지나가자 문득 드는 기이한 감각에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옷자락과 붉은 머리끈의 끝이 흩날리는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종일관 표정에 변화가 없던 남망기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그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익숙한 뒷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망기는 한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눈에 남은 잔상을 떠올리다 몸을 돌려 거리를 나왔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잦았다. 여러 번의 허탕과 가끔씩 찾아오는 단서. 하지만 항상 남망기가 단서를 잡으려는 순간 그는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이쯤 되면 질릴 법도 한데 남망기는 끝까지 그를 찾아다녔다. 사람이 많은 복잡한 거리 속에 긴 붉은 끈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인파를 피해 뒤를 쫓아가도 이번에는 그가 찾는 인물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남망기는 저번에 이릉에 들렀을 때를 떠올렸다. 귀장군 온녕의 상태를 봤을 때 통제는 완벽한 것 같지 않았다. 위무선은 자신 있게 얘기했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 본래 모든 게 완벽할 순 없다. 남망기는 언제 한 번 봤던 아슬아슬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피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속으로 위무선의 이름을 불렀다.
‘위영…….’
선문 세가는 이릉노조와 공존을 포기했고 그를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구실이 없어서 그를 건들지 못했지만 지금은 타도 이릉노조를 서슴없이 행하는데 방해하는 장애물은 없었다. 남망기는 탐색에 속도를 붙였고 얻을 정보를 다 얻자 몸을 돌려 마을을 나섰다. 흐트러짐이 없는 몸가짐에 이마에 묶은 흰 말액이 바람에 휘날려 아름다웠지만 그가 지나가는 길은 어딘가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
궐기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남망기는 드디어 정확한 단서를 잡았다. 음령에 눌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발견했고 그들을 도와주고 정보들을 얻었다. 그들은 이릉노조에게 당한 일이 분한지 그를 매우 욕하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이릉노조는 불야천성으로 향했고 궐기대회에서 4대 가문과 결판을 짓는다. 이것이 대화의 본론이었다. 남망기는 대화를 마치자마자 어검하여 빠르게 불야천성으로 향했다.
***
좀 더 빨리 찾아냈다면 좋았을 텐데. 이것은 남망기가 가진 후회 중 하나였다.
불야천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선문 세가와 팽팽하게 대치하던 줄이 끊겨 서로를 적대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위무선은 더 이상 남망기의 말을 들을 여유도 생각도 없었다. 날카롭게 대꾸하는 모습이 이미 냉정하게 판단을 내릴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평소 견고한 정신을 가진 위무선이었지만 잘못 건들면 깨지기 쉽고 위태로워 보였다.
사저를 잃었을 때 위무선은 이성을 잃고 두 개로 나눈 음호부를 합쳐 선문 세가를 상대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다. 수많은 수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남망기는 곧바로 뛰어갔지만 무섭도록 날뛰는 흉시들과 압도적인 숫자는 세가의 명사라고 불리는 함광군에게도 벅찬 상대였다. 당연히 적지 않은 부상을 입게 되었고 영력도 많이 소진했다. 그러나 남망기는 비틀거리며 떠나는 위무선을 보고 피진에 겨우 지탱해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가 그를 잡고 태워 어검해서 불야천성을 떠났다.
세상사라는 게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항상 한 끗 차이로 놓치고 떠나보내며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고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났다. 남망기는 위무선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
남망기는 영력을 넣으며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줘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뿌리칠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혹여 그가 뿌리칠까. 이 손을 놓치게 될 일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며 절대로 놓치지 않도록 더욱 강하게 잡았다.
얼마 후 남망기는 수십 명의 수사들이 복마동 쪽으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냈던 익숙한 기운도 느껴졌다. 남망기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계속 영력을 불어넣으며 그에게 돌아가자고 권했다.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설득은 계속됐고 위무선은 한없이 꺼져라는 말만 반복했다. 남망기는 뒤에서 다가오는 남계인의 불같은 호통에 그제서야 몸을 돌려 일어났다. 남계인을 따라온 고소 남씨 수사들은 눈앞에 보이는 남망기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순백처럼 하얬던 그의 옷과 장화는 흙과 먼지 피로 얼룩져 더러워진지 오래였고 일어선 모습은 올곧았지만 이마에 있는 말액조차 비뚤어진지 오래였다. 부족한 영력을 이릉노조에게 모두 쏟아내고 있는 모습은 그 어느 때도 보지 못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바른 몸가짐을 중시하는 남망기의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나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남망기는 숙부의 호통에 아무 말도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조용히 피진을 들어 고소 남씨에게 겨눴다. 모두가 입을 모아 헛숨을 들이켰다. 가문 사람들에게 적대의 의미로 칼을 겨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거듭 일어나는 남망기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에 남씨 수사들은 화를 냈다. 남희신은 눈앞에 있는 제 동생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남망기의 눈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
눈을 뜨자 앞은 캄캄하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이었다. 의식도 뚜렷하지 않고 투명한 안개가 머리를 감싼 느낌이었다. 고통은 없었다. 통제하던 흉시들에게 반격을 당해 죽은 위무선은 왜 사후 의식이 남아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죽음이란 본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근데 흐릿하긴 하나 의식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위무선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정신과 기억이 남아있다는 건 혼이 흩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위무선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기억을 정리했다. 뿌옇게 가려진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졌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눈앞에 옅은 빛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일순간 강하게 내리쬐었다. 눈이 부셔 얼굴을 절로 찡그렸다. 시야는 방금 전 강한 빛에 의해 침침했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시 익숙해져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사물이 또렷이 보일 정도가 되자 위무선은 이미 다른 장소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깥은 밤인지 사방이 어두컴컴했지만 방금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는 칠흑은 아니었다. 달빛이 들어와 주변과 공간을 밝혔고 창가와 가까울수록 빛이 밝아 촛불을 켠 듯 훤했다.
위무선은 누워 있는 상태로 눈을 뜨고 낯선 천장을 바라봤다.
‘여기는 어디지?’
과거에 한 번쯤 들렀던 경험이 있는지 기억을 헤집어 생각했지만 도무지 기억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주위를 한 번 훑어보고 곳곳에 놓인 물건들을 보고 위무선은 강하게 뇌리를 스치는 한 기억에 반동으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위무선은 익숙한 천장을 보고 떠올렸다. 자신은 과거 다른 선문 세가 자제들과 같이 이곳에서 수학한 적이 있었다. 여러 곳을 이리저리 쏘다녔고 언제는 남망기랑 단둘이 장서각에 남아 글을 베낀 적도 있었다.
이곳은 고소 남씨의 선부 운심부지처였다. 하지만 정확히 지금 이 장소는 기억 속에 없었다. 내부를 수없이 돌아다녔지만 처음 보는 장소였다. 근데 왜 이런 곳에 대 자로 누워 있었는지 의문을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을 일으킨 위무선은 손을 들었다. 역시 손바닥을 통해 바닥이 불투명하게 보였다. 대충 주위를 훑어보고 몸을 일으켜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분명 바닥을 밟고 걸어가고 있는데 작은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니 너머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언뜻 곤히 자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약간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위무선은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어둠 속에 묻힌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것도 아주. 수학 시절부터 얼굴을 맞대왔고, 몇 번이나 다퉜고, 대화를 하고, 장난을 치고, 마지막에는 서로를 겨눴던 상대가 누워있었다.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이었다. 누워 있는 사람은 마치 옥을 조각해놓은 것처럼 아름다웠고 수려했다. 매우 준수한 얼굴이었지만 얼음처럼 서늘한 기운을 풍겨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위무선은 남망기의 얼굴을 보고 몸이 굳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뒷걸음질을 몇 번 했다. 다시 창가 앞에 돌아와 앉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죽어서도 남망기 침실에 들어와야 해…….’
생전에도 들어가보지 못한 남의 침실에 그것도 아정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함광군의 침실에 밤늦게 들어와 눌러앉아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한탄하는 얼굴 아래로 투명한 달빛이 비쳤다. 온 감각이 사라졌는데 얼굴을 확인하고 나니 왠지 방 안 전체에 단향목 향이 가득 찬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남망기, 불야천, 선문 세가, 이릉노조. 갖은 생각이 복잡하게 떠올랐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마치 직전에 겪은 것처럼 생생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산 온씨에게 끌려가 난장강에 떨어지는 순간, 돌아와 운몽 강씨와 자신의 원수인 온씨에게 복수 한 일, 남망기와 의견 차이로 인한 다툼, 궁기도에서 봤던 금자헌의 모습, 금린대에서 봤던 쓸쓸한 사저의 뒷모습, 그리고 불야천에서 힘겹게 자신의 얼굴을 잡고 ……아선. 하고 마지막으로 이름을 부르던 사저의 얼굴. 이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빠르게 지나갔다. 가슴이 심하게 아렸고 눈이 떨렸다. 혼란 속에 영화처럼 흘러가던 이야기가 어느새 뚝 끊긴 것처럼 눈앞이 새카매졌고 위무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감았던 눈을 뜨면 어느새 바깥은 달빛이 비친 밤이 아니라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은은하게 비추던 둥근 보름달은 들어가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하늘에 떠있었다. 위무선은 혼백 상태였고 잠을 잔다는 감각이 없었으나 잠시 눈을 감고 뜬 것만으로 비슷한 경험을 한 셈이었다.
고요한 방에는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위무선은 몸을 일으켜 다시 안쪽을 들여다봤다. 이미 나가고 자리에 없을 줄 알았으나 남망기는 새벽에 봤던 자세 그대로 하나도 바뀌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웬일이지. 고소 남씨는 해시에 자고 묘시에 일어난다는 규훈이 있고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이미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인데. 생활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남망기가 늦잠을 잔다고?’
위무선은 의아해서 침상 앞에 앉아 그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별다른 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새벽과 다른 점을 찾자면 호흡이 거칠지 않고 안정된 상태로 잠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위무선은 침상 앞에 이리저리 남망기를 쳐다봤다. 새하얀 얼굴이 오늘은 왠지 더 하얗게 보여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면서까지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다니. 함광군답네. 저러고 있으면 안 불편한가? ’
위무선은 한동안 자고 있는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정실에서 나왔다. 경계에 있는 몸은 현세의 사물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했다. 밖으로 나오자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사뿐하게 걸으며 운심부지처 내를 돌아다녔다. 방금 전 그곳은 남망기의 서재 겸 침실인 듯했다. 안쪽에서 걸어 나오니 그제서야 자신이 알고 있는 운심부지처가 보였다. 고소 남씨 수사들은 여전히 피마대효 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녔다. 처음에 위무선은 수사들이 다가오면 몸을 돌려 피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했을 때 몸을 통과해 지나가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재차 자신이 혼백 상태임을 자각했다. 그 뒤는 부딪히든 말든 유유자적하게 걸어 다녔고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순식간에 입구에 도착했다. 나가기 위해 문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투명한 벽에 앞길이 막혔다. 부딪힌 곳이 아프진 않았지만 이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손을 들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살짝 두들기며 확인했다. 결계였다. 위무선은 문득 운심부지처는 결계가 쳐져 있어 통행 옥패가 필요하단 걸 기억해냈다.
‘통행 옥패야 찾아보면 있겠지만 있으면 뭐해. 난 물건을 만지지도 못하는데.’
오고가지도 못하고 운심부지처에 완전히 갇힌 꼴이 되었다.
‘이거야 원. 그렇게 고소로 돌아가자고 날 귀찮게 굴더니 이젠 죽고 나서까지 날 가두려는 거야? 그렇게 안 생겼는데 미련 참 많네. 함광군, 남망기, 남잠아. 제발 나 좀 편히 죽게 내버려 둬!’
위무선은 이 일에 관계되었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는 남망기에게 속으로 신세한탄을 털어놨다.
몇 번 더 결계를 두들겨보더니 결국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운심부지처 안으로 돌아왔다. 정실로 돌아가기 전 위무선은 장서각과 난실에 들렀다. 운심부지처는 불타고 재건했음에도 이전과 똑같은 위치에 그대로 물건이 놓였다. 바뀐 것이 있다면 장서각에 있는 고서나 자료들의 수가 줄었다는 정도. 위무선은 텅 빈 난실과 깔끔하게 정리된 장서각을 보면서 수학 시절을 떠올렸다.
한때 위무선은 혈기가 넘쳐 아무것도 모르는 남망기에게 온갖 장난을 쳤고 결국 그를 꼬셔서 야간에 같이 담장 밖으로 넘어갔다. 그때 희게 질린 남망기의 표정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고 금방 계편이라는 큰 벌을 받으러 끌려갔다. 그와 같이 맞은 계편의 아픔도 아직 뇌리에 생생히 박혀있었다. 지금 보면 철없는 시절이었지만 잘못한 게 없는데 야간 통행 금지 규훈을 어겼다고 같이 벌을 받은 남망기를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왔다. 위무선은 장서각 안의 나무 서안을 빤히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정실로 돌아올 때쯤 붉게 노을이 져 노랗고 붉은 모습이 겹쳐 하늘을 메웠다. 운심부지처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적어졌고 방으로 돌아가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지었다.
정실에 다다르자 끝을 보이던 노을이 산 뒤로 모습을 숨겨버렸다. 노을이 진 뒤 하늘은 급격하게 어둠을 몰고 왔다. 바깥은 금세 어두워졌고 위무선이 안으로 들어갔다. 촛불은 방 안을 훤히 밝혔다. 무엇보다 색다른 점은 남망기가 침상에서 내려와 탁자 앞에 바르게 앉아 눈을 감은 채 정좌를 하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옅은 금빛 눈동자는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어우러져 신비함을 더했다.
남망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려 옆에 가지런히 개어 놓은 옷을 들고 와 앞에 놓고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위무선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등을 돌렸다. 하지만 곧바로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우리 둘 다 같은 남자고 어차피 예전에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내가 왜 등을 돌려야 하지? 게다가 남망기에게 난 보이지도 않는데.’
위무선은 몸을 다시 돌려 앞을 바라봤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충격적인 장면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느슨하게 풀린 옷이 어깨 밑으로 스르륵 내려가 맨살이 보였다. 고운 머릿결은 앞으로 넘겼고 단련해서 탄탄한 몸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시선을 빼앗는 것이 있었다. 그건 계편 자국이 수십 개나 난 등이었다.
상처는 난지 얼마 안 돼 보였고 피가 흘러 등 전체가 붉었다. 거기에 아직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옷에 스쳐 덧났는지 중간중간 굳고 엉킨 피와 고름이 보였다. 계편의 개수를 하나하나 세니 총 서른세 개의 자국이 있었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끔찍이 아파 보였고 감각이 없는 상태임에도 자신의 등이 다 아팠다. 계편은 단 한 대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위무선은 계편에 직접 맞아봤기에 누구보다 고통의 정도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위무선이 충격에 빠져있을 때 남망기는 물이 담긴 통을 들고 와 부드러운 천에 물을 묻혀 천천히 피와 고름을 닦아냈다.
과거 두 사람은 계편에 맞았고 위무선은 남희신의 도움으로 남망기와 같이 냉천으로 들어갔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들어갔지만 지금 그의 등은 냉천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냉천은 치료를 도와줄 뿐 상처를 낫게 해주지 않는다. 어느 정도 아문 다음에는 효과가 있겠으나 지금 이 상태로는 효과를 보더라도 고통만 더할 뿐이었다. 게다가 이 정도 상처로는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아 냉천까지 가는 것만 해도 일이었다. 계편의 자국은 평생 흉터로 남았다.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장면에 위무선은 눈을 감았다.
‘선문의 명사라고 불리는 남망기가 어째서 이런 가혹한 체벌을?’
위무선은 문득 오늘 운심부지처에서 고소의 문하생들을 스쳐 지나갈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권운 모양이 없는 말액을 했고 아마 타지에서 온 문하생들로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
“함광군께서 이릉노조를 도왔다는 게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나도 직접 보지는 못했고 어제 다른 문하생이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깜짝 놀랐지 뭐야. 선문 세가의 적이고 사도의 길로 돌아서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이릉노조에게 정도의 모범인 함광군께서 왜 그런 짓을 하셨는지 모르겠어.”
“저번에 뭔가 소란스러웠는데 설마 함광군 때문에?”
“에휴, 몰라. 정확한 사정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얼른 가자. 고소 남씨는 뒤에서 남의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규훈이 있으니까.”
젊은 문하생들은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화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나를 도와? 남망기가? 언제?’
위무선은 기억을 떠올렸지만 여전히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남망기가 또 위무선과 관련돼 벌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등을 보고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망기는 이미 등을 다 닦아내고 앞에 개어둔 깔끔하고 새하얀 침의로 갈아입은 뒤 해시가 되자 침상에 누웠다. 위무선은 계편자국을 본 뒤로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기 껄끄러웠다. 그와 멀리 떨어진 창가 앞에 앉아 둥그렇게 떠오른 보름달을 바라봤다.
어제와 똑같은 보름달이면서 오늘은 왠지 어제보다 크기가 더 크고 밝기도 더 밝은 기분이 들었다. 위무선이 가만히 하늘에 떠오른 달과 별을 보는 사이 침상 쪽에서 작게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남망기가 내는 신음이었다. 등의 상태로 보아 아직 낫지도 않았고 통증도 여전한 모양이었다. 열심히 고통을 참고 있었지만 그래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통증이 심한 지 들릴락 말락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시간이 지나자 신음은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귓가에는 깊게 잠들어 쌔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위무선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정실 창가 앞에 앉아 턱을 괴고 남망기에 대해 생각했다. 오랫동안 남망기는 자신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권유했다. 단호히 거절해도 안 좋게 헤어져도 이젠 질릴 법도 한데 다음에 만날 때마다 고소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남망기가 자신을 정도로 이끌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도를 수련해서? 그 길이 몸과 심성을 망쳐서? 위무선이 아는 남망기는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싫어하고 말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남망기가 위무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만한 답은 나오지 않자 위무선은 깊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시간이 지나 보름달의 빛이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창가에 계속 앉아있던 위무선은 손을 들었다. 손뿐만 아니라 몸이 점점 투명해지면서 손을 통해 불투명하게 보이던 사물이 이제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갈 시간이 됐다 이건가. 하긴 여기에 남을 이유도 없고 애초에 왜 곧바로 혼백이 흩어지지 않고 여기로 왔는지 모르겠는걸.’
위무선은 오랫동안 앉아있던 창가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침상 앞에 서보니 어제에 비해 밝게 빛나는 보름달에 침상까지 빛이 밝게 들어와 남망기의 얼굴이 잘 보였다.
‘어제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알겠네.’
상처로 인해 고열이 올라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열이 올라도 얼굴색은 바뀌지 않는 게 신기해 위무선은 손을 뻗었지만 닿기 직전에 손을 거뒀다. 뻗어봤자 만지지도 못했고 땀을 닦아줄 수도 없었다. 지금 가능한 일은 그저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소리를 꾹 참고 애써 힘들게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위무선은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미련이 있는 건 오히려 내 쪽일지도 모르지.’
운심부지처, 그것도 굳이 남망기가 있는 정실에 온 이유. 그와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끝맺음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라도 다시 재회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 남은 미련이 반응해서 사후 이곳으로 데려온 걸지도 몰랐다.
위무선은 몸을 돌려 자고 있는 남망기를 뒤로하고 앉았다. 그러자 품에서 어떤 물건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앞을 보던 고개가 떨어진 물건 쪽으로 돌아갔다. 물건을 들어 정체를 확인하자 위무선의 동공이 커졌다. 손을 뻗어 물건을 집자 놀랍게도 그 물건은 손안에 잡혔다. 좀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해 밝은 창가 앞에 가서 달빛에 비추자 역시나 예상한 대로였다.
이건 운심부지처 통행 옥패의 조각이었다.
이게 왜 자신의 품속에 있는지 위무선은 알 수 없었다. 혈세불야천 이후 위무선은 이성을 잃고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거의 모두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일을 스스로 기억해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통행 옥패는 고소 남씨에서만 발급되는 것으로 운심부지처의 출입에 관련된 물건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나오지 않았다.
위무선은 고소에 가기 싫어했으며 이 일로 몇 번이고 남망기와 의견 마찰이 종종 있었고 또 수학 시절에 자주 부딪혔다. 물론 사이가 나쁘지는 아니었지만 역시 타인과의 접촉을 싫어해 대화도 몇 마디 안 하는 남망기가 누군가에게 통행 옥패를 건넨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자신이라면 더더욱.
위무선은 수학 시절에 통행 옥패를 받았지만 중간에 돌아오게 됐을 때 반납했다. 그 이후 더는 볼일이 없는 옥패였다. 하지만 위무선의 품에서 떨어진 건 그 통행 옥패의 조각이었다.
***
남망기는 이릉노조를 찾으러 고소 남씨를 나설 때 통행 옥패를 하나 더 챙겨서 나갔다. 고소에 오기 싫어하는 그였기에 받기를 거절할지도 몰랐지만 최소한 돌아올 장소라도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다.
통행 옥패는 깨지지 않도록 소중히 소매 안에 넣고 다녔다. 하지만 건네기는커녕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았고 엇갈리는 일이 태반이었다. 거기에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남망기 또한 심신 모두 한계에 다다라 복마동에 위무선을 데리고 와 쇠약해진 그에게 영력을 넣어주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선문 세가는 결코 이릉노조를 놓아주지 않았고 그들보다 먼저 달려온 남씨 수사들과 남계인의 호통에 남망기는 일어나 위무선의 앞을 막아섰다. 변명을 해보라는 숙부의 말에 그저 변명 한 마디 하지 않고 검을 겨눴다. 언제나 선한 편에 서서 자신의 신념대로 소신껏 이행해 온 남망기가 처음으로 반대 편에 서 같은 편을 베었다. 남망기는 모든 일을 끝내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숙부에게 시간을 달라 간청하였다. 남계인은 방금 전 남망기가 내비친 표정과 거듭 반복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크게 화가 났으나 애써 차오른 분노를 꾹 눌러 참고 잠깐 동안 여유를 주었다.
남망기는 정신이 거의 없는 위무선을 데리고 난장강까지 데리고 갔다. 편히 기댈만한 곳을 찾아 조심스럽게 기대게 하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초점 없는 눈은 탁했고 피가 튄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음호부를 사용한 탓에 음울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남망기는 얼굴에 묻은 피를 소매로 살살 닦아주고 속에서 통행 옥패를 꺼내 위무선의 품속에 넣었다. 옥패가 떨어지지 않게 꽁꽁 싸매 고정시킨 뒤 초점 없는 눈을 마주하고 몇 마디 말을 전했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망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위무선을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
위무선은 통행 옥패 조각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더니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통행 옥패는 자신이 처음 받은 옥패가 아니었다. 첫 번째 옥패는 반납했으니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두 번째 옥패의 조각이었다. 조각은 산산조각 나듯 잘게 부서져 있었고 깨진 단면은 거칠었다. 옥패가 깨진 이유도 보통 충격을 받아 깨진 게 아니라 강한 힘에 의해서 깨진 것 같았다. 거기에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이유는 통행 옥패가 이미 기능을 상실할 정도로 부서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접 만질 수 있다는 건 죽기 직전까지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위무선은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했지만 결국 조종하던 흉시에게 반격 당했을 때로 결론이 났다.
고소, 정실, 뒤에 누워있는 남망기, 손에 들고 있는 옥패 조각. 여러 가지 단어를 퍼즐처럼 머릿속에 조합하니 이 옥패 조각은 남망기가 준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꼈다. 흐릿한 기억 속에 정확하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위영, 필요하면 언제든지 고소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위무선은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왜 이 말만 기억이 나는지.’
한바탕 웃고 나니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위무선은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머리끈을 풀었다. 점점 투명해져 존재가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머리끈에 남아 있는 붉은 색상만큼은 뚜렷이 보였다. 위무선은 끈을 접어 남망기의 곁에 놓았다. 그리고 옥패 조각을 들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남잠, 이건 내가 가져갈게. 나도 똑같이 이별 선물을 줬으니 우리 둘 다 쌤쌤인거다. 나중에 가져갔다고 화내지 마!”
활짝 웃는 얼굴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몸은 투명해져 거의 사라졌고 달빛에 비춰 환하게 보인 얼굴도 금세 작은 빛 가루로 흩어져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
오랜만에 꿈을 꿨다. 눈앞에는 아슬아슬하게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떠나가는 그를 쫓아 손을 뻗었다. 빠르게 다가가도 사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멀어졌다. 저 멀리 가는 길 끝에 귀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무선이 천천히 걸어 길 끝에 다다랐다. 남망기는 다급해진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위영!”
익숙한 얼굴이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위무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남망기가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순식간에 곁에서 미소 짓던 귀신들이 위무선에게 달려들었다. 그 때 시야는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끔찍한 악몽에 눈을 떴다. 눈앞에는 익숙한 정실 천장이 보였고 고열로 인한 땀이 이마와 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남망기는 몸을 일으켜 앉아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남망기는 문득 손 안이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손을 들어 확인해봤지만 손바닥에도 침상 위에도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저 착각이라 치부하기엔 손 안에 남은 따스한 감각은 생생했고 감각의 여운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보름달이 기울어 눈부신 달빛이 얼굴을 비췄다. 남망기는 고개를 돌려 보름달을 바라봤다. 허공에 빛인지 먼지인지 모를 것이 떠다녔다.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고 반짝거렸다. 남망기가 그 빛에 손을 가져다 대자 빛은 손 위에 남아 머물다 사라졌다. 빛이 모두 사라지자 보름달은 역할을 다 한 듯 모습을 감췄다.
마치 그 자리에 존재했다 사라진 신기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