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사이시 조- 첫사랑


설
@seol_mdzs

기억의 초상
찬란한 겨울이 다가올 가을의 끝자락이었지만, 위무선의 시선은 일찍이 겨울을 담았다. 순백의 의복이 남망기의 정적인 움직임과 함께 바닥에 희게 앉았다. 설산처럼 하얀 사내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단정한 자세로 그 자리에 머물렀다. 얼핏 보면 그는, 흰옷을 입은 백의관음과 닮았는데, 이렇듯 도려께서는 때때로 저와 같은 현세의 인간이 맞는지 헷갈리게 만들어, 위무선은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재차 눈을 비비곤 했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그는 지금처럼 온몸에 겨울의 운치를 두르고 있었다지. 태어난 계절을 고스란히 삼킨 소년은 어떠한 것들보다도 고왔다. 생명을 품은 빛은 마치 영롱한 세사細沙와도 같아서, 위무선은 그때 이미 남망기에게 미혹된 것은 아닐까 간혹 고민에 빠지곤 했다. 만물에 상주불멸은 없다지만 만에 하나 영원이 있다면 그건 함광군의 미용일 것이라 감히 자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망기의 수려한 용모는 사시사철 죽지 않았다. 적어도 위무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고, 이는 콩깍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어때서. 유별나기 그지없는 인생에 유별난 사랑은 당연했다.
있잖아, 남잠. 우리가 몰래 입을 맞췄던 채의진 길목 계수나무에 단풍이 들었더라. 두서없이 만개한 미소부터 보이자 깊은 동면에 빠져 있던 남망기의 눈에 약간의 온기를 머금은 추풍이 분다. 미소에 닿았던 눈길이 서서히 아래쪽으로 다가갔고, 눈빛은 금세 호기심을 품는다.
“비파, 어디서 났어.”
예상대로 한 아름 안은 비파의 출처를 남망기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본래 이렇게 궁금증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변화의 연유는 모두 자신이었으니 본인밖에 탓할 사람이 없었다.
남망기는 당연하다는 듯 선물받은 비파를 빼앗았다. 종종 갈피를 잡기 어려운 질투를 보였지만 위무선은 그저 행복에 겨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췄다. 일부러 모르는 척,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쥐고 있던 비파 한 알을 손바닥으로 살살 굴렸다. 그것도 아주 야릇하게.
“그거 알아? 질투는 약사불藥師佛도 못 고치는 불치병이야.”
“…….”
“넌 비파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어릴 때도 탐내더니 또 그러네.”
“탐낸 적 없어.”
실속을 떠보며 손장난을 치던 위무선은 저질적인 행동을 멈추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비파가 아니라 날 탐냈지.”
대답도 눈길도 회피했지만 위무선은 속내를 바로 눈치챘다. 한껏 들떠서 혀끝으로 비파 껍질을 핥자 도려의 도발적인 행동에 남망기의 귓불이 연시 빛으로 여물었다.
“원한다면 비파도 나도, 전부 남잠에게 줄게. 가질래?”
비파를 한 입 베어 먹으며 짓궂은 미소를 흘리자, 남망기는 눈을 내리깔며 다소 거칠게 위무선의 턱을 움켜쥐었다.
“원해.”
그리고는 비파 한 덩이와 함께 위무선의 입술을 물었다. 위무선이 만족스럽게 웃자 여유까지 빼앗고 싶은지 빈틈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낭자들에게 받은 선물을 소중히 품에 안고 올 때마다 질투를 내비치는 그께서는, 언제나 도려를 향한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낭자들이 선물을 주고 싶었던 이가 실은 함광군이었다는 사실은, 구태여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소박한 행복을 누리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부턴가 위무선의 몸에서 남망기를 닮은 은은하면서도 단순한 향이 나기 시작했다. 본연의 체향이 희미해져 갈 때쯤, 낯선 향내가 정실을 시작으로 몸까지 뒤덮기 시작했다. 오감이 발달한 위무선은 금세 알아차렸다.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의 출처가 어디인가 곧장 의문을 품었고, 별안간의 깨달음을 얻은 건 늦은 밤이었다. 부군의 위에 올라타 가슴에 코를 묻고 자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낮에 맡았던 것과 동일한 향내가 그에게서 났다. 당연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던 까닭은 낯설지만 전혀 모르지만은 않은, 떠오르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향기였기 때문이었다.
위무선은 궁금한 걸 담아둘 수 있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묻고 싶은 건 묻고 따지고 싶은 건 아무리 대하기 어려운 사람일지라도 따져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었다. 감정의 파란이라도 있었던 건지. 당사자의 면전에 대고 망설이지 않고 물음을 털어놨다.
“남잠, 너에게서 낯선 향기가 나. 어디 다녀왔어. 무슨 일 있는 거지?”
이름 모를 내음이 청정을 물어간 것일지도. 좁은 간격에서 느껴지는 향이 점점 짙어지는 건 착각이 아닌 듯했다. 미묘한 불안이 향과 함께 섞였다. 하지만 위무선의 변화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남망기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때때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골몰히 고민하다가 영 답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쉽게 던져 버리곤 했는데, 남망기의 일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넌더리가 나도록 묻는다 한들, 속사정을 모르는 이는 대답을 않을 것이다. 없는 눈치 전부 끌어모아 내린 결론은, 남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지난 몇 년을 되짚어 보면 남망기가 유독 차분해지는 시기가 있었고, 그는 항상 괜찮다고만 대답했다. 이 위 모, 단언컨대 어쭙잖은 거짓말을 누구보다 많이 한 사람으로서 괜찮다는 말은 전혀 괜찮지 않은 상황임을 확신한다. 그런 연유로 온 집안을 누비고 다니며 남망기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을 붙잡고 탐문을 하였다. 그들은 애초에 별반 다르지 않은 평소의 함광군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였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이 집에 남잠을 알아주는 사람, 나밖에 없구나. 위무선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원체 말이 없는 사내였지만 누가 봐도 얼굴에 그늘이 졌는데 어찌 그걸 모를까.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저도 죽기 전에는 남망기의 감정을 눈곱만큼도 읽지 못하지 않았던가. 과연 그들을 탓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은 줄을 지어 뻗어 나갔다.
그날도 남망기는 어김없이 향취를 풍겼다. 마음에 담아둔 짐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면 좋으련만. 그는 끝까지 저에게 일말의 걱정도 나눠주지 않으려 했다. 철저한 무심이 근심을 얹어 준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대체 무엇이 두려워 말해 주지 않는 것인지 답답했다.
다른 문하생에게 위무선의 소식을 전해 들은 남사추는 제가 아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이야기를 듣자마자 급히 그를 찾았다. 위무선은 소문대로 생각에 잠겨 멍하니 풋사과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남사추가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손가락은 풋사과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남사추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시기의 함광군은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 같았어요. 누군가를 그리는 사람 같기도 했고요. 너무 궁금한 나머지 직접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라고만 말씀하셨어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라…….”
위무선이 모르는 시기였으니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없음 또한 당연했다. 깊숙이 파고든다고 해서 그 고통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지금 할 일은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위무선은 위무선의 방식대로 남망기를 정성껏 위로하였다. 평소처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눴고, 사랑도 아낌없이 퍼부었다. 잠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맞대고, 숨결을 더하고, 일상을 만들어 주고. 받은 만큼 고스란히 더해 아껴두었던 사랑까지도 전부 전해 주었다.
허나 다다익선인 줄만 알았던 사랑이 과유불급이 되어 화를 입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두 사람은 눈빛만 오고 가도 불이 붙는 신혼이었고, 이를 간과한 것이 위무선의 실책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마냥 좋았다. 내일은 안중에도 없어 밤낮없이 달려드는 이를 붙들고 똑같이 달려들었다. 삼배를 올린 지 오래되지 않은 신혼부부였으니, 밀폐된 공간에서 웃고 떠들기만 한다는 건 가당치 않았다만, 정분이 나다 못해 흘러넘칠 기세니 범인犯人의 몸이 버틸 수가 있어야지. 밥을 먹다가도, 대화를 하다가도 몸을 섞었다. 특히나 부군 역할 맡으신 분께서는, 야사夜事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위로가 도리어 독이 된 건지, 더욱이 남망기의 구속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에 흔적을 남기기만 하면 다행이건만, 종일 물고 빨고 놔주지 않았다. 손발을 묶어 두지만 않았을 뿐이지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온종일 안고 입을 맞고 몸을 맞대니,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정말 이릉노조는 잇따라 참패를 당할지도 몰랐다. 체력의 한계를 느낀 위무선은 살기 위해서라도 당장 해결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위무선은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독한 고량주를 머금은 위무선이 남망기의 무방비한 입술을 품었다. 위무선이 넘긴 술 한 모금을 그대로 삼킨 남망기는 곧바로 취기가 도는지 고개가 휘청거렸다. 풀린 눈을 하고 있다가 십 초 만에 침상으로 쓰러졌다. 위무선은 그 틈을 타서 오랫동안 봉인해 놓았던 향로를 꺼내 들었다. 이것만큼은 다시 쓰고 싶지 않았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않았던가. 탁자 위에 대충 세워 두고 목석처럼 뻗은 이를 안고서 잠이 들었다.
* * *
음산한 바람이 불었다. 밤기운이 유독 차게 느껴져 위무선은 몸을 떨며 눈을 떴다. 정신이 퍼뜩 들기도 전에 끔찍한 풍경이 목전에서 펼쳐졌다. 만물의 멸절을 부르는 순간도 이리 참혹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위무선은 모조리 눈에 담았다. 추태를 올곧게 응시하며 하나도 빠짐없이 집어삼켰다. 일을 그르친 것은 이 몸이요, 이날의 정경은 전부 이 손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그다음을 기억하는 위무선은 남망기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부러 웃었다.
“나와 고소로 돌아가자.”
토씨 하나 변하지 않은 익숙한 한마디였다. 아무리 남망기가 담아 두었던 속마음을 전했다 하여도, 진심을 받는 것은 순전히 제 몫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위무선은 생각도 않고 튀어 나갈 뻔한 대답을 도로 입술에 담았다. 남망기는 향로의 영향 때문인지 기억이 전혀 없는 듯했으나, 놀랍게도 위무선은 모두 기억했다. 지금의 위무선은 그 모든 상황을 뒷전에 두고, 오로지 남망기만 눈동자에 채웠다. 남망기는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죄를 물으려는 게 아니야.”
뒤이어 서툴게 말을 덧붙이는 이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는 자신은 저 얼굴을 보고도 몰랐단 말인가, 후회가 되어 아린 가슴을 움켜쥐었다. 만일 여기서 고소로 돌아간다면 뭐라도 달라질까. 어쩌면 더 잔혹한 결말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아니. 그건 안 돼.”
“위영.”
“그런데 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야? 아닐 텐데.”
딱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다. 확신이 없다면 확신할 용기를 불어넣으면 그만이니까. 흔들리는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멱살을 당겨 입을 맞췄다. 곁에 있던 강징이 기겁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는 두 사람을 떼어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위무선은 운몽 강씨 사람이라며 편을 들려던 것을 전부 물리고 싶을 정도로 격렬한 접문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적극적이지 않으면, 이때의 남망기는 알아듣지 못할 게 분명했다.
잠시 뒤 남망기는 정신을 차리고 위무선의 어깨를 밀쳤다. 흐트러진 숨을 가다듬을 생각도 않고, 지극히 차분한 표정의 위무선을 매섭게 노려봤다.
“뭘 그리 화내. 장담하건대 나중에는 네가 먼저 나에게 입맞춤하게 될 거야.”
젖은 호흡이 닿을 만큼의 거리에서 속살거렸다. 위무선은 혹여나 그가 놀라 뒷걸음질 칠까, 뒷덜미를 잡고 고개를 고정시켰다. 눈동자를 바라보니 시선의 중심이 때아닌 돌풍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위무선은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네가 오는 건 어때.”
“…….”
“기다릴게.”
혼란에 빠진 남망기를 뒤로한 채 서서히 손을 놓았다. 간극이 벌어지자 다시 애가 타는 듯 남망기의 애처로운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강징은 살다 보니 너 미치는 꼴 다 보는구나, 위무선의 멱살을 잡고 두 사람을 더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머리를 심하게 다치면 싫어했던 사람도 좋아지냐?”
강징은 헛구역질을 하며 위무선을 끌고 갔다. 위무선은 자꾸만 남망기가 눈에 밟혀 끌려가는 내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남망기는 차마 따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위무선이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응시했다. 형제나 다름없는 위무선의 연애 사정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한 기분을 자아냈다. 강징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 잠시 체면을 내려 두고 소리를 질렀다.
“위무선, 그만해. 너 미쳤어?!”
강징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위무선의 시선이 순식간에 땅으로 꺼졌다.
침상에서 떨어진 사람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홀로 잠에서 깬 위무선은 주먹 크기의 혹이 난 뒤통수를 움켜쥐고 앓다가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다. 깊이 잠든 도려께서는 아직도 향로의 꿈에서 헤매고 있는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직 꿈에서 깨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저도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고.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부드러운 날숨에 자신의 이름이 섞였다. 위무선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주위를 살피더니 남망기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었다. 콩닥콩닥 뛰는 소리를 지표로 삼아 다시금 도려를 찾아 헤맸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더듬거렸다. 이 공간의 너머에서 얼핏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위무선은 청각에 의지해 쉴 새 없이 뛰다가 가까스로 소리의 근원지에 도달했다. 냉큼 손부터 뻗자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지푸라기 잡듯 그것을 세게 움켜쥐자 연분홍 작약 하나가 덩그러니 손에 남았다. 주위를 두루 살펴보니 새하얀 얼굴의 소녀들이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미소에는 어렴풋하지만 싸늘함이 담겼다. 작약과 소녀들을 번갈아 가며 보던 위무선은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급히 누각 난간으로 뛰어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이쪽을 올려다보는 이는 멀리서 봐도 눈이 부셨고, 기운은 따사로운 초여름의 낮보다 뜨거웠다. 바람에 나부끼는 말액과 함께 나풀거리는 백의, 길게 뻗은 속눈썹마저도 불어오는 살랑임에 섬세함을 더했다. 그라는 빛은, 주변의 존재를 전부 미천하게 만들 만큼 시선을 압도했다. 위무선은 수십 번 고민했다. 이름을 부르면 외설이 될까 하여, 누구도 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였다. 어느 누가 감히 부를 수 있고, 부르겠다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남잠, 남망기!”
하지만 위무선은 휘파람 불어 보듯 아주 가벼이 그 이름을 불렀다.
따져 보면 잠시간인데 저에게는 억겁처럼 느껴졌다.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예상대로 남망기는 휘장을 걷고 제 곁으로 다가왔다. 자세히 훑어보니 조금 전에 만난 사내와는 달리 눈에 띄게 성장해 꽤나 다부진 몸매를 자랑했다. 정작 이때의 위무선은 남망기를 그저 지나가는 인연으로 생각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건,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였다. 남망기는 위무선의 긴장을 눈치채지 못하고 무심히 꽃을 건넸다.
“네 꽃.”
작약의 의미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작약을 주다니. 무슨 정신으로 이런 장난을 쳤던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초대받은 손님은 여전히 자리에 앉지 않고 뻣뻣하게 경직된 채 위무선을 봤다. 그 시선이 괜히 부담스러워 비스듬히 기대앉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쪽도 무심한 척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답했다.
“줄게. 그거 너 가져.”
“시시하군.”
“시시한 건 남잠이야. 매사에 쓸데없이 진지해. 너 대체 왜 올라왔어? 그까짓 꽃 하나 전해 주려고? 실은 고소로 돌아가자고, 그리 말하려고 내게 왔지.”
정곡을 찔린 남망기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지자 그 자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뻘쭘하게 서서 위무선을 노려봤다. 일단 앉아. 옷자락을 당겨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남망기에게 술을 권하는 건 의미 없는 행동이라 생각하여 술 한잔 권하지도 않았다. 그가 취하면 전부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했고, 남망기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전부 귀담아들어야만 했다.
“저번에도 말했지. 네가 이쪽으로 와. 여기서 같이 살자.”
“…….”
“날 좋아하잖아! 백봉산 위렵 때 입을 맞췄던 건 그런 의미 아니었어?”
“……뭐?”
소녀들이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듯 환호성을 지르며 꽃잎을 흩뿌렸다. 위무선은 언제나 주위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굴었다. 어차피 남망기와 저를 제외하고는 전부 인간이 아니었지만.
“우리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중요한 건 남잠이 나를 좋아하고, 그보다 훨씬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거야.”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가 함께할 것이라는. 이때도, 그리고 미래에도 남망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건 언제나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었다.
“갈 거지?”
그러니 당연히 손을 잡을 것이라고 위무선은 단정했고, 남망기는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내미는 손을 잡았다. 그게 순리였다.
둘은 허례허식 따위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이릉에 살림부터 차렸다. 이릉의 노조께서 작간을 부려 함광군을 꾀어냈고, 부정한 하룻밤을 계기로 연을 맺었다는, 차마 입에 담기에 민망할 정도로 거창한 소문이 마을까지 퍼졌다. 하지만 어떠한 소문도 조금의 진실을 담지 못했고, 남망기와 위무선은 소문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사실 위무선은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야 이건 향로의 꿈이니까. 하지만 남망기는 고소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매 순간 전심전력을 다했다. 농사와 육아에 재능은 없었으나 이론만은 빠삭했고, 결점은 미목수려함에 가려져 그의 명성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남망기에게 호감을 느꼈다. 위무선이 잠시 한눈을 팔면 그의 곁에 어느새 사람들이 북적였다. 남망기는 그저 군자 된 자로서 어르신의 밭일을 도왔을 뿐이었다. 빛을 발하는 그의 외모가 이럴 때는 원망스러웠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밥 먹을 자격도 없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저를 구박하던 온정도, 함광군의 실수는 일체 함구했다. 이러다가 남잠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부터 났다. 아무리 꿈이라도 그건 싫었다. 그래서 참다못한 어느 날, 체면을 구기는 한이 있어도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외쳐야겠다고 생각한 어느 오후, 위무선은 남망기의 팔을 끌어안으며 생각 않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내 부군이니까 아무도 눈독 들이지 마!”
“어머, 초야도 치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저리 단언하시지.”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할 때까지, 곁에 아무도 두지 않고 독신일 것만 같던 이릉의 노조께서 서투른 사랑 고백을 하니, 말은 그렇게 해도 저이도 결국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구나,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위무선은 그저 여물지 않은 마음을 서슴없이 드러내며 자기 사람 지키기에 바빴다. 남망기의 온 관심과 정성이 한 사람에게 향한다는 것을, 당사자만 몰랐다.
* * *
위무선의 다리에 붙어 있던 온원은 무를 심느라 움직임이 잦은 기둥을 버리고 그늘에 말뚝을 박은 것처럼 서 있는 남망기에게 옮겨갔다. 남망기는 찌는 더위에 조금 지친 모양인지, 산사나무 아래 그늘에서 쉬는 중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있던 그는 온원이 안아 달라고 보채자 조금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어떻게 안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온원을 대했다.
남망기는 생각보다 익숙하게 아이를 안았다. 의외로 이 아이는 상당히 낯을 가려 순순히 외부인의 품에 안기는 법이 없었는데, 남잠이 아비라도 되는 모양이지. 덕분에 위무선도 모처럼 게으름을 피울 수 있기도 했고, 그들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멀찍이서 두 사람을 지켜봤다. 잠잠하던 온원이 갑작스럽게 남망기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물었다.
“돈 많은 형아도 선 형아가 좋아?”
저를 지칭하는 건가 머뭇거리던 남망기는 이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둘을 지켜보던 위무선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아원, 너 또 남잠을 귀찮게 했지. 온원은 혀를 내밀며 남망기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돈 없는 형아는 돈이 없으니까 돈 많은 형아를 좋아해야 해. 온원이 혼자 중얼거리자 위무선은 헛웃음을 뱉었다.
“아원, 너 잘 생각해. 키워 준 사람이 누구야?”
“돈 많은 형아!”
암만 아끼지 않고 정을 준다고 하더라도, 자라나는 아이는 그 사실을 쉬이 잊는다. 그만 귀찮게 하고 이리 와. 위무선이 온원을 떼어 내려고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지. 한마디로 정리하자 더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무릇 농사라는 건 세상살이의 이치를 담았더랬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어 수확하기까지 대미大尾를 위한 일련의 시련이 존재한다. 언제나 풍년일 수 없고, 또 언제나 흉년일 수 없다. 인간도 그렇다.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면, 이 순리의 궤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삶과 죽음도, 산 자와 죽은 자의 간격도 좀처럼 좁혀질 수 없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나 매한가지이다.
한 번의 기회를 떠나보낸 위무선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이번 생은 격류보다는 완류의 삶이 되길 바랐다. 남잠, 이왕이면 나는, 이곳의 너도 흐르는 대로 살며 행복했으면 좋겠어. 허나 생각은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로 흩어졌다. 딱 거기까지의 자격만 주어진 것이다.
세찬 바람에 나뭇가지가 거세게 흔들리자 산사자가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고개를 흔들며 시선이 위로 향하자 이번엔 이마 위로 열매가 떨어졌다. 물안개 피어오르듯 옅은 미소가 만면에 퍼졌다. 위무선도 남망기를 따라 웃었다.
“아원의 자를 남잠이 지어 줄래? 그 아이가 너를 많이 좋아해.”
“생각해 둔 게 없어?”
“내가 뭐라고. 그리고 넌 뭐든 잘하니까.”
말하면 하늘에서 뚝 떨어질 것처럼 쉽게 이야기했다. 과연 지금의 남망기는 어떤 이름을 지어 줄까 궁금하여 위무선은 살짝 기대에 부푼 눈빛을 했다.
“하나 있어.”
그러자 남망기는 곧바로 이름을 지었다. 아주 예전부터 생각해 둔 사람처럼. 위무선은 더운 햇볕에 목이 말라 물을 들이켜며 심드렁하게 물었다가, 예상 밖의 대답을 듣고 놀라 마시던 물을 거름 주듯 밭에 뿜었다. 못 들은 건가, 남망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 번 더 알려 주었다.
“사추.”
다시 그 이름을 내뱉자 위무선은 사레가 들어 연신 기침을 했고, 남망기는 굳이 뒷말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반응이 불편한지 미간을 좁혔다. 위무선은 젖은 입술을 아무렇게나 소매로 닦으며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칭찬했다.
“과연, 함광군은 훌륭한 아버지야! 이제 아리따운 부인만 두면 되겠다. 마음에 드는 여인은 있고?”
마음에도 없는 물음을 넌지시 던지자 역시나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평소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더니 위무선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너잖아.”
입술이 만들어 내는 마음의 조각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지. 별안간의 고백도 그랬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은 탓에 시선도 시간도 한곳에 멈췄다. 남망기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네가 있어.”
한 시진 동안 주워 담은 건데, 아깝게도 안고 있던 산사자 광주리를 떨어뜨렸다. 그래도 두 번은 말하기 싫은지 화제를 돌렸다.
“날이 추워.”
태연히 떨어진 열매를 다시 줍는 모습이 냇가에서 미석을 고르는 여인 같았다. 섬세한 속눈썹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새삼 가슴이 떨렸다. 그가 등을 돌리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위무선은 생각했다.
“너 남잠이지.”
“…….”
“전부 기억하면서 여태 날 속였어?”
배신감에 양손에 남아 있던 산사자를 전부 남망기에게 던졌다. 흰옷이 울긋불긋 물들었지만 남망기는 개의치 않고 위무선을 안았다. 영락없이 폭삭 안긴 꼴이 되자 위무선은 금세 포기하고 허리에 팔을 둘렀다. 목덜미에 뜨거운 고개를 내리자 땀과 먼지, 그리고 흙의 냄새가 가득했다. 지금이라면 어떤 내음이 묻어도 바람이 곁들어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 어쩌지. 벌써부터 네가 좋아. 넌 어때. 버틸 수 있겠어?”
“……나도.”
“너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내 말에 동조해.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잖아.”
“어땠는데.”
그 시절의 남망기가 어땠는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위무선은 자신했다. 너네 남씨에 대한 이야기를 집필하면 서책을 꾸러미로 안겨 줄 수 있어. 같잖은 허세를 부렸지만, 남망기의 눈에는 마냥 사랑스러웠다. 우는 아이에게는 단것을 물리면 그만이니, 으레 잔말을 이어 갈 입은 허튼소리 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게 유일한 타개법이었다. 그리하여 애정 어린 입술이 거짓을 모르는 입술에 맞닿았다. 이는 고소의 명물되는 천자소에 버금갈 만큼 감미롭고 온화한 맛이었다.
전날 내내 농사일로 시달린 탓이었다. 금단이 없는 육체는 이것마저도 버거운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농사일이 고되었던 모양인지 깊이 잠이 든 남망기는 묘시가 지나서도 눈을 뜨지 못했다. 위무선은 남망기의 어깨 위로 야금을 덮어 주며 잠든 이의 이마에 몰래 입술을 내렸다.
다른 건 몰라도 위무선은 물건을 파는 데에는 소질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보다 입담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의 재치 있는 입담과 준수한 외모 때문인지 벌이가 꽤나 짭짤했다. 열심히 채소와 과일을 팔고, 그 돈으로 주전부리와 옷을 사자 짐이 산더미만큼 불어나는 바람에 생각보다 외출이 길어졌다. 이 몸으로는 어검을 할 수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짐을 들고 걸었다.
제 몸뚱이보다 커다란 짐을 이고 겨우 마을에 도착했을 때, 저 멀리 남의 집 앞을 서성이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왜 저리 청승맞게 서 있담. 다가가 보니 흑단의 머리칼과 함께 잡아당기고 싶을 정도로 긴 말액의 끈이 휘날렸다.
“남잠?”
엄마 잃은 예닐곱 아이처럼 부름에 흔들리는 얼굴에는 슬픔의 빛이 역력했다. 그 고운 얼굴이 울상이 되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위무선은 한달음에 달려 내려갔고, 남망기는 거칠게 위무선을 안았다.
당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위무선은 어안이 벙벙해 허공에 뻗은 팔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멈췄다.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냐, 어떤 망나니냐, 그놈을 송장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호언장담했는데, 다 큰 사내 둘이 얼싸안는 눈꼴사나운 짓을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온종일 위 공자를 찾아다니느라 혼비백산이셨다고요. 자초지종을 들은 위무선은 자신을 때려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지금은 그저 그의 감정에 녹아들기로 했다.
불안에 떠는 어깨에 조용히 얼굴을 묻으며 기다리는데,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익숙한 향취가 후각을 깨웠다. 이건 산사자 특유의 향이었다. 이 향기에 무게감이 깃든 건, 향기가 도려의 그늘과 함께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깨달음을 얻자 눈이 시큰거렸다. 매운바람 때문일 거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꿈이고, 눈을 떠도 꿈이다.
“더는 잃지 않아도 되잖아. 남잠.”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고 서둘러 남망기를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끝없이 사랑을 속삭이자 청아한 눈에 물기가 어렸다. 눈동자 속의 바다는 탁해졌지만 이내 흐린 기운이 결정을 만들어 내어 눈가에 다시 반짝임이 서렸다. 이마저도 감탄밖에 흘러나오지 않음이, 세상이 그를 사랑하는 까닭이었다.
“날 봐. 이렇게 웃어, 응?”
손가락으로 입술 끝을 찢어지게 벌렸다. 다행히 남망기도 이 상황이 우스운지 입매가 잔잔하게 호선을 그렸다.
“남잠, 너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난 네 도려니까 괜찮지만. 거기에 무슨 말 못 할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고.”
고개를 젖히며 웃던 위무선은 별안간 몸 전체가 흔들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남망기는 저보다 조금 빨리 꿈에서 깨어나 침상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위무선을 끌어 올렸다. 다시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뻔한 사고를 모면한 몸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유연하게 몸을 놀렸다.
“아이고, 살았어. 남잠 덕분이야.”
“응.”
남망기는 긴말 대신 입을 맞추었다. 잔열이 남은 입술에 연이어 고요한 사랑이 앉았다. 서너 번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위무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이렇게 불안해하니, 우리 밤처럼 항상 붙어 있을까.”
“어떻게.”
“몰라서 물어? 밤마다 네가 나를 안을…… 아, 남잠, 아파!”
뒷말은 으스러지게 안고서 엉덩이를 때리는 남망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구멍으로 삼켰다. 위무선이 성난 토끼처럼 제자리에서 뛰며 씩씩거리자 그 모습이 또 귀여웠는지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방금까지 투덜대던 위무선 역시, 변덕스럽게도 마음이 풀어져 다시금 웃었다.
“넌 웃는 얼굴이 예뻐. 그러니까 웃어.”
시간이 지날수록 새겨지는 목리 같은 이 사랑, 어찌하면 좋을까. 이건 아무나 하지 못할, 누린 자만의 고민이었다.
웬일로 묘시에 눈을 떴다. 위무선은 허전한 옆자리를 내다보며 느리게 눈을 끔뻑거렸다. 밤새 그리 내달렸으면서 어째서 저만 이 꼴인지. 아침부터 숨바꼭질이라도 할 성싶어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도려를 찾기 위해 햇빛이 드는 창가에 앉아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망기를 발견했다. 얼른 벗어 던진 옷을 챙겨 입고 고운孤雲처럼 고적에 싸여 있을 도려의 곁으로 달려갔다.
인기척을 느낀 남망기는 조금 높은 시선을 내리더니 다가온 위무선의 머리 위로 팔을 올려 그늘을 만들었다. 따가운 햇볕이 가려지고 사방이 가로막혔지만, 여전히 위무선의 눈동자는 만천의 별처럼 찬란했다. 남망기는 응달 속에서도 지지 않고 만발하는 도려와 시선을 마주하려고 허리를 숙였다. 그만의 세상에 집중하자 작은 덩어리 같던 슬픔이 다시 태동했다. 위무선은 비틀린 사랑도 면죄해 줄 것만 같은 맑은 미소로 보답했다.
고소에는 무를 심은 밭도, 산사나무도, 그리고 지켜야 할 사람들도 없다. 대신 앙증맞은 토끼와 맛 좋은 천자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의 도려가 있다. 그 많은 것들 중 오롯이 제 것이라 명명할 수 있는 건 남망기뿐이었지만, 이제는 심중의 무게를 알아 쉽사리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전하고 싶었다. 잠시 갈팡질팡하던 위무선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아.”
“응.”
도려의 팔을 잡고 전진하자 남망기는 자연히 그 걸음을 따랐다. 가벼운 걸음에 도리어 놀란 위무선이 뒤돌아봤다. 얼떨결에 남망기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위패에 눈길이 닿았다. 위패 근처에는 산사자가 가득했다. 누군가 가져온 걸까, 바람에 떨어진 걸까. 위무선은 알 수 없었다. 떨어진 산사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위무선은 미련 없이 남망기를 이끌었다. 시절은 지나가는 과객이고 인연은 되돌아오는 바람이니, 더는 연연하지 않았다.